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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풋풋한 사제성소 : 대구대교구의 소신학교 운영

by 윤라파엘 2018. 11. 30.

선목소신학교 검색으로 만나는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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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성당 권마태오  2014.06.17. 18:52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풋풋한 사제성소 : 대구대교구의 소신학교 운영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의 기본 방침은 선교지역에서 그 지역 사제를 길러 자립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파리외방전교회는 조선교구를 맡게 되면서부터 조선인 사제양성에 주력했다. 그런데 유교사회에서 가톨릭이라는 가르침도 낯선 것인데다가 그 핵심인 사제를 기르는 일은 정말로 새로움 그 자체였다. 교육내용이나 방법이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더구나 한국사회는 가톨릭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엄청난 속도로 변해왔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사제양성제도도 수없는 변화를 거쳤다. 1951년 밀양 피난지에서는 6년제 소신학교 졸업생, 4년제 소신학교 졸업생, 3년제 소신학교 졸업생이 동시에 졸업하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그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사제양성교육을 위해 교회전체가 일사분란하게 협조함은 교회만의 힘이었다. 그렇지만 이 중 잊혀져가는 제도가 있다. 소신학교이다. 그러나 소신학교 교육은 사제양성의 기본 출발이었다. 한국교회에서는 서울, 대구, 덕원의 소신학교가 서로 협력하며 국가와 사회의 제반 상황에 대처하며 사제성소를 싹틔워 왔다.


언어부터 일체를 배워야

선교지에 들어오지도 못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미 요동지역에 신학교를 세울까를 검토했다. 모방신부는 입국하자마자 신학생 선발부터 서둘렀다. 그러나 어디서 누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를 놓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은 작은 나라이므로 신학교가 있다는 걸 알면 조정에서는 전국을 한꺼번에 수색할 수도 있다. 요동에 신학교를 설치하면 라틴어보다 중국어를 배우느라 시간을 빼앗길 수 있고 또 사절이 오가는 길목이라 위험도 컸다. 결국 선교사들은 성소자를 발굴해 마카오나 홍콩, 페낭 등으로 보내는 방법을 택했다.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가 선발되어 나갔다. 매스트르 신부, 베르뇌 신부, 페레올 주교 등도 이들을 가르쳤다. 장래 조선선교사들과의 앞당긴 만남이었다. 그러나 신학생들은 전혀 다른 문화적 바탕이라 언어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어렵게 입국한 선교사들은 박해 속에서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대로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앵베르 주교는 신학생들을 계속 선발하는 한편, 라틴어수업을 면제하여 속성으로 사제를 서품하려고 했다. 그는 중국에서 한문으로 간행된 신학서적으로 정하상, 이민우, 이재의, 최형 등을 직접 가르쳤다. 그러나 박해는 이 시도를 좌절시켰다. 다블뤼는 5명의 어린 학생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라틴어와 한문의 초보교육을 실시했다. 그렇게 해서 다음 선교사를 싣고 오는 배가 귀환할 때 신학생들을 파견하려 했다. 실제로 1854년 쟝수(楊) 신부가 타고 온 배로 임 빈첸시오, 김 요한, 이 바울리노가 유학을 떠났다. 쟝수 신부는 조선 입국의 기회를 3년이나 기다려 선교지에 입국했으나, 도착 3개월 만에 다블뤼 신부 품에서 선종했다. 이 신학생들은 1855년 배론에 성요셉신학교가 열리자 귀국해서 배움을 계속했다. 두 명은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 직전까지 21명의 신학생이 페낭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또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선교사들이나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선교사들은 중국 요동지역 차쿠에 조선대목구 대표부를 개설하고 조선인 신학생들을 교육시켰다. 글자와 언어부터 가르치는 철두철미함으로 시작된 교육이었다.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소신학교 과정은 물론 아예 그 이전의 초등과정도 가르쳐주어야 했다.


성유스티노신학교의 소신학교

1911년 대구교구가 출발했다. 대구교구는 교육에 많은 사람들이 뛰어들었다. 1885년 로베르 신부는 블랑주교의 명을 받고 원주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했다. 오늘날 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이다. 부엉골신학교는 두 해 뒤 김대건이 순교했던 새남터가 내려다보이는 용산 함벽정으로 옮겨졌다. 드망즈 주교는 1900년부터 6년간 이 용산신학교 교수였다. 드망즈 주교는 처음부터 신학교에 관심을 가졌다. 주교는 부임한 직후부터 서울에서 공부하는 대구교구 신학생들을 파악하고 시험결과나 건강까지 챙겼다. 1914년 10월 1일 신입생 40명과 용산신학교에서 내려온 18명, 일본인 신학생 1명 등 총 59명으로 성유스티노신학교가 문을 열었다. 최덕홍, 이기수 등도 이때 신입생이었다. 주교는 1912년 대구 신학생 중 첫 번째로 주재용에게 삭발례를 행하면서 대구교구의 성소양성이 늦어진 것을 한탄했다. 그런 면에서 유스티노신학교의 출발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신학교는 소신학교 과정과 대신학교 과정을 함께 했다. 소신학교 과정은 라틴어 초급반과 상급반으로 나뉘어 각각 3년이었다. 고등교육 과정인 대신학교는 철학반 2년, 신학반 4년으로 나뉘었다. 신학교에서는 사제가 되기 위해 필요한 과목들을 중심으로 교과과정이 짜여졌다. 교육과정단계의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라틴어가 기본이었다. 학사관리도 엄격했다. 박동준 신부는 신학교를 떠나기 싫어 눈물을 흘리면서 보따리를 싸던 친구들 모습을 회고했다. 그의 동기생 39명 중 7명이 사제가 되었다. 이때 1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이 징집으로 자리를 뜨고 원조금이 줄어들어도 드망즈 주교의 신학교 운영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다. 신학교 운영 때문에 교구는 적자 재정이 불가피했지만, 주교는 이를 지켜 나갔다.

한편, 1921년 베네딕도 수도원에 소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교회는 19세기 말부터 각 본당에서 읽기, 쓰기, 셈하기 등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학당’을 다수 운영했다. 그러는 사이 한국은 근대교육제도를 확립해 나갔다. 이에 뮈텔 주교는 전문 교육사업을 위해 베네딕도회를 초청했다. 베네딕도회는 현재의 동숭동과 혜화동 일대에 숭신사범학교와 승공학교를 세우고 근대적인 사범교육과 기술교육을 시작했다. 그러나 베네딕도회는 일제의 탄압 등으로 교육기관의 운영이 힘들어지자 1910년대 말부터 본당 사목에 나섰다. 그리고 1920년 원산대목구가 설립되어 함경도, 만주, 간도 지역을 맡게 되었다. 이에 초대 원산대목구장 사우어 주교는 1921년 수도원 부설 소신학교를 수도원 내에 설립했다. 이 신학교는 6년 후 베네딕도회가 함경도 덕원으로 이동할 때 함께 옮겨갔다. 1935년에는 덕원신학교가 대학으로 승인됐다. 이렇게 서울과 대구, 덕원의 세 신학교가 축이 되어 개화기, 일제시기의 격변 속에서 교회와 민족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사제를 양성했다.


유스티노 - 동성상업학교 을조 소신학교

1920년대에 들면서 교회 안에서도 발전하는 사회 추세에 맞추자는 욕구가 일었다. 고등교육기관인 대신학교 과정과는 달리 대신학교를 준비하는 중등교육 과정인 소신학교는 차제에 분리 독립시켜 일반 교양과목도 교육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22년 조선인 연장자 신부들은 드망즈 주교에게 신학생들에게 세속 과목을 강화해 달라고 요청했다. 서울에서도 1928년 소신학생들이 교장 신부에게 정규 인가를 받은 신학교에서 공부하도록 조치해 달라고 청원했다. 1929년 서울에서는 대신학교와 소신학교를 분리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대신학생들은 종래대로 용산신학교, 소신학생들은 옛 베네딕도 수도원 자리로 갔다. 통합형 신학교 체계를 분리형 체제로 변경함과 동시에 소신학교의 교육 내용을 변경하는 개혁이었다.

소신학교 교육을 강화하는 방법으로는 신학생들이 남대문상업학교의 교육과정을 받도록 했다. 이에 앞서 서울대목구는 1922년 소의학교를 인수했다. 소의학교는 민족진영의 유지들이 서소문 근처에 설립했다가 1920년 현 약현성당 뒤로 옮기고, 3년제 을종상업학교인 ‘소의상업학교’로 재출발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인해 그 경영을 서울대목구에 의뢰했다. 교구에서는 이를 받아 5년제 갑종 상업학교로 승격시키고 남대문상업학교로 개명했다. 남대문상업학교는 교회가 운영하는 중등교육 과정의 정규 학교였다. 남대문상업학교는 1928년부터 혜화동에 자리잡았고, 이듬해 용산신학교에서 소신학교 과정의 학생들이 옮겨왔다. 남대문상업학교는 갑조 일반학생과 을조 신학생으로 구분되었다. 을조 학생들은 예전 베네딕도수도원 건물에 함께 기거하면서 신학교 규칙에 따라 생활하고, 교사들이 신학교로 와서 가르치는 형식이었다. 당시의 식민지 교육관계 법령에서는 소신학교가 용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법적으로 을조 과정을 이수하면 대신학교에 진학하여 정규 고등교육을 받도록 연계 편제되어 있었다. 한편, 학교 교사가 혜화동의 동소문 쪽으로 옮기고 보니, 남대문상업학교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아 1931년부터 동성상업학교로 개칭했다. 이때부터 대구교구가 소신학교를 폐쇄하고 이곳으로 소신학생들을 입학시켰다. 여기에 평양교구도 합류했다.

드망즈 주교는 소신학생들이 사제양성에 필요한 라틴어를 완전히 이수하면서 동시에 중등과정의 일반 학문들을 공부하도록 소신학생들을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은 서울에서 졸업한 후 대구의 대신학교로 진학하기로 했다. 서울과 대구교구는 공사비를 분담하여 서울 베네딕도수도원의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물론 소신학교의 신학생 생활비도 각 소속 교구가 부담했다. 교복과 구두대금, 여비 등은 신학생 자신이 부담했다. 1931년 동성상업학교 박준호 교장이 대구에 와서 입학시험을 치러 16명을 합격시켰다. 그리고 1929년에 입학한 대구의 소신학생들은 입학시험을 본 후 용산 소신학교 과정에 들어갔지만, 1926년도 소신학생들은 대구에서 공부를 마치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대구교구의 소신학생들이 동성상업학교 을조로 진학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유스티노신학교는 3년에 한 번씩 신입생을 선발했는데, 이때부터는 대구교구도 매년 신입생을 낼 수 있었다. 드망즈 주교는 매년 20명씩의 입학인원을 확보해 두었다. 그리고 주교는 서울에 공부하러 간 학생들의 생활과 학업을 일일이 점검했다. 서울에 갈 때마다 대구교구 소속 소신학생들을 접견했다. 그리고 대구의 소신학생들도 서울로 공부하러 가거나 방학에 내려와도 유스티노신학교를 정신적 거점으로 삼았다.


소신학교 폐교와 베드로관

1942년 용산신학교에 변화가 왔다. 조선인 노기남 신부가 서울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되자 조선 총독은 용산신학교를 무인가 학교라며 폐쇄했다. 하지만 다행히 교회에는 총독부의 인가를 얻은 덕원신학교가 있었다. 서울대목구는 대신학생들을 덕원신학교로 보냈다. 반면 소신학생들은 인가를 받은 동성상업학교의 학생이었기에 계속 교육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 이어 1945년 유스티노신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교당했다. 그런데 서울교구는 어렵게 인가를 얻어 1945년 경성천주공교신학교를 개교했다. 그래서 대구의 대신학생들도 이곳으로 진학했다.

1945년 해방이 되고서 얼마지 않아 덕원신학교도 공산정권에 의해 해산 당했다. 교회에 하나뿐인 신학교인 경성천주공교신학교는 시대에 맞추어야 했다. 이 학교는 해방된 정부의 대학령에 의해 1947년 성신대학과 성신대학부속중학교로 재편되었다. 대학은 혜화동 동성상업학교 을조가 기숙하며 교육받던 곳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성신대학부속중학교의 소신학교 과정은 중등과 4년, 고등과 2년으로 나뉘어 중등과는 용산 신학교 교사에 있었다. 6.25가 일어나자 학교는 제주도를 거쳐 밀양에 정착했다. 밀양 피난학교 시기, 교육법의 개정에 따라 성신대학부속중학교는 각기 3년제인 중· 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또한 ‘부속’이란 말은 사범대학 이외에는 허용되지 않아 1951년에 성신중학교, 성신고등학교로 거듭났다. 1953년 이 세 학교는 모두 서울의 혜화동으로 복귀했다.

1962년 한국교회 교계제도가 설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주교들은 1966년 대구관구에 선목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대구, 광주관구 소신학생들을 교육했다. 그러나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 실시로 1971년 선목중학교가 폐교되었고, 3년 후 선목고등학교도 폐교했다. 서울의 성신중학교도 1971년 폐교했다. 그리고 1983년 2월 28일 성신고등학교의 폐교로 인해 한국교회에서 소신학교는 사라졌다. 그러나 15년 후 대구대교구에서는 무학고등학교에 사제직 성소자를 위한 기숙사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2002년부터는 이를 ‘베드로관’이라 불러 오고 있다. 그 못자리에서는 지금도 풋풋한 성소의 모들이 자라고 있다. 사제양성교육의 변화는 한국사회의 변화를 여실히 드러낸다. 아울러 사제들 간에도 얼마나 차이가 나는 교육을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노사제들은 소신학교 출신들은 다르다고 말한다. 한 명의 사제성소를 위해 가정이 할 일, 본당이 할 일, 소신학교가 할 일, 대신학교가 해야 할 일이 각각 있다. 지금은 그것을 모두 대신학교에서 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배출된 성직자는 급격히 변화해 가는 일반 신자 및 사회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가야 하는지를 질문하게 한다.

[월간빛, 2014년 6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