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파엘's 공간/┕ 신앙의 길

전부산교구장 이갑수 가브리엘 주교 -2004년 사목지 기사

by 윤라파엘 2017. 2. 1.

선목소신학교 검색으로 만나는 기사입니다.


2004년 11월 310호

전부산교구장 이갑수 가브리엘 주교

김진복



사제, 그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교구 사제의 영성’이라는 주제로
이번 호의 특집을 준비하며 화두로 삼은 질문이다. 여기에는 사제의 신원과 소명,
사목생활 등이 포함될 것이다.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고도 하는
사제, 그는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질문을 들고 전
부산교구장 이갑수 가브리엘 주교님(81세)을 찾아갔다. 주교님은 1950년 10월 28일
사제가 되시어 1971년에 주교품을 받아, 부산교구 보좌주교가 되시고, 1975년부터
부산교구장으로 재임하시다가 1999년 8월에 은퇴하셨다. 이갑수 주교님은 부산 다대포
앞바다가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일반 아파트에서 생활하시며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틈틈이 견진성사 등을 집전하시고 여러 교구의 사제 피정을 지도하셨다. 그러나
기자가 찾아갔을 때에는 며칠 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바깥출입을 하시지 못하는
형편이셨다.

지난해 초에 뵈었을 때보다 주교님의 얼굴이 많이 수척해 보이십니다.

2년 전에 수술한 대장암은 완치 상태이나 그 뒤로 허리가 편치 않아 오래 서있거나
걷기가 불편했어요. 그런데 요 며칠 전부터는 무릎 관절도 안 좋아 이렇게
두문불출하다시피 집 안에서만 지내고 있지요.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과 이 모든 것이
하느님 섭리의 손길이라는 걸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저희 『사목』은 이번 호에 ‘교구 사제의 영성’을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그래서
‘사제, 그는 누구인가?’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질문은 제 자신에 대한 성찰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안에서는 모든 지체가 다 같은 기능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열두
사도들을 특별히 간택하시어 당신의 권한을 나누어 주셨고, 또 사도들은 그들의
협력자들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군중들 가운데 사도들을 부르신
것같이, 교회가 신도들 가운데 하느님과 신도들에게 봉사하도록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품성사로써 선임한 사람들이 바로 사제입니다. 그래서 사제를 라틴어로 “Alter
Christus(또 하나의 그리스도)”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 사제를 두고 이렇게
노래했다는데 참으로 의미심장해요. “사제여,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그대로부터
온 자 아니니/ 그대는 무로부터 왔느니라./ 그대는 그대를 향하여 있는 자 아니니/
그대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중개자니라./ 그대는 그대를 위해 있는 자 아니니/ 그대는
하느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하느니라.// 사제여,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그대의
것이 아니니/ 그대는 모든 이의 종이니라./ 그대는 그대가 아니니/ 그대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니라./ 그러면 그대는 무엇인고?/ 사제여, 그대는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니라.

주교님께서는 틈틈이 부산교구뿐 아니라 여러 교구의 사제 피정을 지도하시면서
이러한 주제로 강의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제는 누구인가?’ 하는 사제의
신원에 대한 답은 명약관하한데,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일 수 있겠습니다.

사제의 주요 임무라 하면, 크게 보아 말씀 선포와 전례의 집전, 그리고 하느님 백성을
위한 봉사라 할 수 있어요. 올봄에는 대구대교구 신부님들의 피정에 함께했는데 제
강의 주제가 ‘현대의 사제상’이었으니 방금 내게 하신 질문과 같네요. 대구
신부님들한테 제가 들려준 이야기는 고상한 신학적인 해설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이야기한 내용을 여러 신부님들께서 자신의
신원을 성찰하는 자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서울대교구의 손희송 신부님이 쓰신
『주님이 쓰시겠답니다』라는 책의 맨 뒷부분에 있는 내용으로, 사제를 버스의
운전기사로 비유하여 설명하셨는데 참으로 적절한 비유였다고 생각합니다. 강의록이
여기 있으니 길지만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버스의 운전기사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골라 태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제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이에게
자신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사제는 자신만을 위한 스포츠카나 고급 승용차의 기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버스의 기사라는 점을 늘 잊지 말아야겠지요. 버스에는
노약자를 위한 특별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제는 모든 이를 위한 사람이지만
특별히 노약자나 소외받는 이들에게 더 관심과 애정을 쏟아야 합니다. 버스 기사는
기분 내키는 대로, 자기 편한 대로 운전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노선을 충실히
따라갑니다. 마찬가지로 사제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운전기사가 난폭하게 운전한다면 승객들이
불안해하듯이 사제도 예수님의 길에서 벗어나 자기 뜻대로 산다면 신자들이 두려움과
괴로움으로 신음하게 되지요. 버스는 이처럼 정해진 노선을 따라 정류장마다 정차해서
기다리는 사람을 모두 태우고 갑니다. 이와 같이 사제도 신앙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교회라는 버스에 싣고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갑니다. 또한
기사는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차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하고, 기름이 충분한지를
기본적으로 확인합니다. 사제 역시 사제직을 올바로 수행하려면 평소에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바로 기도와 영성생활이지요. 외적인 활동과 개인적인 취미생활 때문에
기도생활을 소홀히 한다면, 기름이 떨어지거나 고장 난 버스처럼 중도에 서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의 쇄신을 얘기할 때 “신자들보다 신부님들이 먼저 변화되면 쇄신의
길이 엄청나게 빨라질 것이다.” 하고 진단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주교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그 지적에 대해 저 역시 공감합니다. 제가 조금 전에 읽어드렸듯이 우리 신부님들이
‘나는 어떤 운전기사인가?’ 하는 점을 냉철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신부님들이 본당에서 신자들로부터 과공에 가까울 정도의 존경을 받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그래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사제가 오히려 섬김을 받는 사람이
되어 자신의 신원을 혼동하게 되지요. 신부님들은 차도 좋은 차, 운동도 고급 운동을
즐기는 등 너무 중산층화되어 있다거나 허영심이 많다는 지적도 더러 있는데,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반성해 봐야 할 것입니다.

주교님은 사제가 되신 지 54년이 되었습니다. 주교님의 사제생활 50여 년을 돌아보실
때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

뭐니뭐니 해도 1967년부터 대구의 선목소신학교 초대 교장직을 맡았던 때가 가장
활기에 넘치는 시간이었지요. 산중턱 허허벌판에 뼈대만 세워놓고 문을 연
소신학교여서 신학생들이나 우리 신부들의 생활이 힘들고 할 일이 태산 같았어요.
겨울에는 얼음을 깨서 세수할 정도였으니까요. 지금도 그 소신학교 출신 제자
신부님들이나 평신도들을 만나면 함께 고생하던 일을 떠올리곤 합니다.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님도 거기 소신학교 출신인데, 3년 전 교구장 착좌식에 갔더니 첫마디가
“아이고, 우리 교장신부님!” 하시며 반기시더군요. 김수환 추기경님이 바로 제
윗반인데 추기경님이 대구에서 ‘가톨릭신문’을 맡고 계실 때 저와 숙식을
함께했지요. 그때 머리를 맞대고 아등바등 바둑을 두던 기억이 새롭네요.

몸이 불편하신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교님의 빠른 쾌유를
빌겠습니다.

인터뷰·사진 / 김진복(본지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