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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국내여행 종합

새해첫날 포항 나들이,,

by 윤라파엘 2011. 1. 2.

경주이씨 시조유적지 ->신라 탈해왕릉->포항죽도시장 

 2011년 1월 1일

 

 

 

 

경주표암 정문

 

 

 

 

 

 

 

왕릉을 향해 큰절을 올리듯 누운 소나무가 이채롭다. 잘 다듬어 놓아 보기에도 좋다. 

 

이 누운소나무는 1959년 사라호 태풍때 쓰러진후 그후 겨울에 폭설이 내려 더 내려 앉은 것이라고 한다.  뿌리가 죽지않고 계속 살아 있다.

나무가 왕릉쪽으로 자라는 것은 , 높이솟은 인근의 나무들에 햇빛을 차단 당하고, 경쟁을 피해 .햇살이 내리는 공간으로 뻗은것 이란

설명을 해 둔 곳이 있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 여서 옮겨 놓는다.

     

탈해왕릉 이야기 더보기

신라 탈해왕(재위 57∼80)의 무덤으로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2대 남해왕의 사위로 4대 왕에 오른 탈해왕의 무덤이라고 전한다.

경주 시가지 서북방 표암(瓢巖) 근처에 위치하며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다. 릉(陵) 전면(前面)은 평지이지만 후면(後面)은 얕은 경사를 이루고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14.3m, 높이 4.5m이다. 봉분 주위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으며, 호석(護石)을 설치했던 흔적도 외형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봉분의 전면에 놓여 있는 상석(床石)은 후대에 설치한 것이다. 신라 제4대 왕인 탈해이사금(脫解尼師金)(재위(在位) 57-80)은 석씨(昔氏)로 토해이사금(吐解尼師金)이라고도 하며, 왕비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다.

 

유리왕(琉璃王)의 유언에 따라 62세에 왕이 되었는데 난생설화(卵生說話)를 가지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본래 왜국(倭國) 동북 1천여리에 위치한 다파나국(多婆那國) 출신으로 그 나라 왕비(王妃)가 알을 낳으니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비단에 싸서 보물과 함께 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처음에 금관국(김해)(金官國(金海))에 닿았으나 아무도 거두지 않았다. 계속 표류하던 궤는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에 닿았고, 한 노파가 거두어 키웠는데 처음 궤짝이 떠올 때 까치 한 마리가 따라다니며 울었다고 하여 까치 작(鵲)자에서 조(鳥)를 떼어버리고 석(昔)으로 성을 삼고 아이가 궤를 풀어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였다 한다.  그가 자라서 석(昔)씨의 시조로서 신라 최초의 석씨 왕(昔氏 王)이 되었다.

 

한편 신라땅 아진포에 도착한 탈해는토함산에 올라 7일동안 서라벌을관찰했다고 하는데, 반월모양의 산봉우리를 발견하고 그 곳이 살기좋다고 여겨 내려왔는데, 이미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탈해는 그곳에 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 이집이 원래 자기조상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집을 차지해 버렸다. 이 과정을 눈여겨 본 남해왕이 지혜롭다 하여 탈해를 사위로 삼았던 것이다. 

 기록에는 재위 24년에 왕이 돌아가니 성(城) 북쪽 양정구(壤井丘)에 장사 지냈다고도 하고 또는 소천구(疏川丘) 속에 장사지냈다고도 하였으나 양정구(壤井丘)나 소천구(疏川丘)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신라에서 탈해왕(脫解王) 시기에 이와 같은 봉토분(封土墳)은 출현하지 않았으며 그 위치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서 석씨 성을 가진 여덟 왕 중에 무덤이 남아 있는 것은 탈해왕릉 뿐이다.

 

탈해왕릉 앞 송림 - 송림 밖으로 표암 이알평 유적지가 함께 있다.

 

숭신전 자료 더보기

신라의 왕은 박씨아니면 석시, 김씨이다. 이들세 성씨의 첫왕을 기리기 위해 재실이 각각 ‘숭덕전(박혁거세,경주오릉내), ’숭신전(석탈해,탈해왕릉옆), ‘숭혜전(미추왕,대릉원내)’이다. 해마다 춘분과 추분에 이들 세곳에서 동시에 향사가 봉행된다. 숭신전은 신라 4대 석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위해 1898년 월성안에 지었으나 1980년 월성정비사업계획으로 월성 안의 민가들이 철거됨에 따라 탈해왕릉의 옆인 현재 자리로 옮겨왔다.

숭신전은 본전 3칸·전사청 2칸·상의재 4칸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홍살문을 통해 보이는 숭신전

홍살문이란??

홍전문(紅箭門)·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9m 이상의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놓고, 붉은칠을 하고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이 있다. 홍살문은 신성한 공간임을 표시해 주는 역할을 한다.

 

 

관련 기사인용 - 2011.01.21 다음 

신라왕 석탈해는 러시아 캄차카반도 출신?

오마이뉴스 | 입력 2011.01.21 12:05 | 수정 2011.01.21 12:28 |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만주와 더불어 고대 한민족의 생활근거지였던 한반도는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이유 때문에, 역사 속의 한반도가 대륙의 끄트머리로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유라시아대륙. 붉은 별표 부분은 본문에서 언급될 캄차카반도.

ⓒ 구글 위성지도

하지만, 이런 인식은 지극히 대륙 중심적인 것이다. 한반도는 유라시아대륙과 태평양이 만나는 접점이다. 대륙 위주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대륙과 해양을 함께 시야에 넣을 경우, 한반도는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허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이곳은 다양한 지역으로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끄트머리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곳이다.

한반도가 그런 곳이었다는 증거의 하나로서 신라왕 석탈해의 출생신화를 들 수 있다. 그의 출신국이 어디인지를 조사해보면, 다양한 출신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한반도라는 허브에 몰려들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MBC 드라마 < 김수로 > 에 등장한 석탈해(이필모 분).

ⓒ MBC

석탈해, 그는 사실 버려진 게 아니다

신라 제4대 임금인 석탈해(재위 57~80년)는 토착 한민족이 아니었다. 그는 이방인 출신이었다. 그의 출생신화가 < 삼국사기 >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편, < 삼국유사 > '탈해왕' 편, < 가락국기 > 에 소개돼 있다.

이에 따르면, 석탈해는 자기 나라에서 왕후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난생(卵生) 즉 알에서 출생했다는 이유로 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상자에 실린 채 한반도 동남부에 표착했다.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난생은 혼외정사로 인한 출생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알이 버림을 받는 경우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 사유로 한반도에 흘러들어온 그가 해안가에 표착했을 때에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따라왔기에,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를 떼어낸 석(昔)자를 성씨로 삼게 됐다고 < 삼국사기 > 와 < 삼국유사 > 는 말하고 있다. 이것이 기록상으로 보이는 월성(경주) 석씨의 기원이다.

신화에서는 석탈해가 상자에 실린 채로 한반도 해안에 표착했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는 상당한 규모의 세력을 갖고 한반도에 도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 해안에 출현한 뒤에 김수로의 왕권에 도전했다가 패배하고 나서 가야 군함 500척의 추격을 받고 신라 해안으로 도주했다는 < 가락국기 > 기록을 볼 때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가야 임금 김수로가 석탈해를 쫓기 위해 500척의 함선을 동원했다면, 석탈해 역시 상당 규모의 선박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본래 왕후의 아들로서 신분상으로 고위층이었으므로, 그 정도 세력을 거느리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 자기 나라에서 그만한 세력을 이끌고 왔기에, 신라 왕실의 환영을 받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출신국 명칭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 가락국기 > 에서는 완하국(琓夏國)이라 했고, < 삼국사기 > 에서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이라 했으며, < 삼국유사 > 에서는 용성국(龍城國)이라 했다.

사료마다 명칭이 다 다르지만, 이 명칭들은 실상은 동일한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 삼국유사 > 에서는, 용성국은 정명국·완하국·화하국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이런 점을 보면, 석탈해의 출신국이 주변 세계에 여러 가지 명칭으로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20세기 이전의 중국인들이 조선왕조를 조선·한국·고려 같은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 것과 똑같은 일이다.







새로 둔갑한 석탈해(왼쪽)와 김수로가 대결을 벌이는 장면으로서 < 가락국기 > 신화를 형상화한 것이다. 사진은 국립김해박물관 맞은편의 벽화.

ⓒ 김종성

석탈해의 출신국은 어디에 위치했을까?

그럼, 완하국·다파나국·용성국·정명국·화하국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외부 세계에 알려진 석탈해의 출신국은 어디에 위치했을까? 이에 관해 < 삼국사기 > 에서는 "그 나라는 왜국 동북쪽으로 1천 리에 있었다"고 했다.

지도상으로 볼 때, '왜국 동북쪽 1천리'에 해당하는 곳은 캄차카반도(현재 러시아땅)뿐이다. 물론 일본열도와 캄차카반도 사이의 거리가 문자 그대로 1천 리는 아니다. 고대인들은 막연히 먼 곳을 가리킬 때에 백이나, 천이니 만이니 하는 숫자들을 그저 습관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1천리 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일본열도 동북쪽으로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은 캄차카반도뿐이라는 사실이다.

흥미롭게도, 석탈해와 캄차카반도의 관련성을 제기한 연구결과가 있다. 역사인류학자인 김화경(남자)의 논문 '석탈해 신화의 연구'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캄차카반도의 카멘스코예라는 해변 마을에 전해지는 신화와 한반도에 전해지는 석탈해 신화의 유사성을 제기했다. 논문에 소개된 캄차카반도의 신화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해안가에서 어로작업을 하며 생활하는 미티는 남편인 쿠이키나쿠(큰까마귀)가 집을 비운 사이에 정부(情夫)인 바크팀티란(까치인人)을 불러들여 밀회를 즐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티와 바크팀티란이 은밀한 만남을 즐기고 있는 사이에 쿠이키나쿠가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밖에서 아무리 불러도 미티가 나오지 않자, 이를 이상히 여긴 쿠이키나쿠는 불을 지펴 침실로 연기가 들어가도록 했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외간남자인 바크팀티란이 숨을 헐떡거리며 침실에서 뛰쳐나왔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미티는 두 개의 알을 임신했고 그것이 두 명의 인간으로 바뀌었다. 쿠이키나쿠의 집에서 바크팀티란의 두 아이를 양육하던 미티는 쿠이키나쿠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두 아이를 가방에 집어넣고는 그 집을 떠나버렸다."

알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점이나 까치가 등장하는 점이 석탈해 신화와 유사하다는 것이 김화경의 주장이다. 유사한 신화가 한반도와 캄차카반도에 존재하는 점을 볼 때 석탈해 집단이 캄차카반도에서 한반도 동해안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근거 외에도, 캄차카반도의 신화 속에는 석탈해 신화와 유사한 측면이 많다. 혼외정사로 인한 '알의 임신'에 의해 태어난 아이가 출생지를 떠난 이야기가 두 신화에 모두 존재하는 점도 그렇고, 두 신화 모두 해양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경북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소재 '석탈해왕 탄강 유허'. 석탈해가 신라에 처음 출현한 유적이라 하여, 1845년에 석씨 문중에서 조선정부의 지원을 받아 건립한 곳이다.

ⓒ 문화재 지리정보 서비스

신라왕 석탈해, 캄차카반도 출신 가능성에 무게

물론 유사한 신화가 두 지역에 존재한다는 점만으로, 석탈해가 캄차카반도에서 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 삼국사기 > 에서 석탈해가 왜국 동북쪽에서 왔다고 했고 일본열도 동북쪽인 캄차카반도에 석탈해 신화와 유사한 신화가 있다는 사실은, 신라왕 석탈해가 캄차카반도 출신일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다.

이런 추정에 힘을 실어주는 근거로서, 일찍이 청동기 시대부터 시베리아 동북쪽 해안에서 한반도 해안에 이르는 해로를 왕래하면서 암각화(바위그림)를 남긴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들이 남긴 문화적 흔적인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나 울주 천전리 암각화 같은 것이 그 증거로서 제시되고 있다.

이는 고대로부터 유라시아대륙 동북쪽의 해양이 활발히 이용됐고 이 해양에서 해류를 따라 문화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열도보다 훨씬 북쪽에 사는 사람들과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문화적 교류를 했다는 사실을 보면, 석탈해가 캄차카반도에서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게 그리 이상한 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유목민들이 서북쪽의 몽골초원을 거쳐 한반도나 만주에 도래해서 한민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허황옥(가야 초대 왕후)을 비롯한 일단의 인도인들이 해로를 통해 한반도 동남부에 정착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다양한 지역으로부터 다양한 고대인들이 한반도로 몰려들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알래스카와 마주보는 캄차카반도에서도 사람들이 도래하여 한민족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은, 고대 한반도가 여러 지역 사람들의 집결지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육로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해로를 통해서도 사람들이 한반도로 몰려들었다는 것은 한반도가 그저 유라시아대륙의 '끄트머리'에 불과하지 않고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허브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반도가 그 같은 허브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발해 멸망 이후 한민족의 영토가 한반도로 축소됐다는 것으로 인해 스스로를 질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륙이 끝나는 곳에 산다는 사실로 인해 절망을 느끼기보다는, 해양이 시작하는 곳에 산다는 사실로 인해 희망을 느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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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표암,탈해왕릉,숭신전 이 세종류의 볼거리는 같은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는 경주시 우회도로 구황로 바로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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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죽도시장

 

겨울철 별미인 게 산지인 동해안 중 소문난 영덕 울진보다, 품질 가격이 더 좋다는 포항을 들렀다. 

 

게를 찌는 방법은 18분~20분정도 찌는것이 가장 맛이 좋으며,(물이끓을때부터) 정종을 넣으면 비린내를 없애주고 물에 삶으면 안되며 ,목부가 위쪽으로 가게해야 게장이 몸밖으로 흐르지 않는다.. 이건 상식이고 , 판매하는 곳에서 쪄 달라고 하면 된다. 약 15분 소요

수많은 게 판매점들이 들어선 죽도시장 게 판매 점 앞,,,

시장전체 풍경을 담으려 생각했지만, 눈치가 보여 게를 구입한 집의 부분만 담았다.

 

 

홍게

홍게(붉은대게)란? chionoxcxtes japonicus

홍게는 수심 700~2000미터에서 서식하며 마리당200~500g정도 나가며 ,짠맛이 나고 몸전체가 붉은 색이다.
대개 단백질 함량이 많으며,그중에서도 필수아미노산(리신,로이신,메티오닌등)이 풍부해 ,발육 어린이에게는 아주 훌륭한 식품이다.
기타..해열작용과유방암치료,동맥경화,정력에 등등에 좋다고 말하고 있다..

붉은색의 홍게

 

 대게(Chionoecetes opilio)와 붉은대게(Chionoecetes japonicus)의 구별】

대게는 값이 비싸며 또한 어획량이 적어 유사품으로 등장한 게가 붉은대게(홍게)이다.

붉은 대게는 한국 동해나 일본전역의 수심 700~2,000m 해역에 서식하며, 겉모양이 대게와 비슷하지만 껍질이 딱딱하고 속이 꽉차지 않았으며 맛이 덜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붉은 대게는 온 몸통이 진홍색으로 붉지만 , 대게는 등쪽은 주황색이며 배쪽은 흰색에 가깝다.

게류의 갑각이나 다리에는 색소성분인 아스라크산틴(Astaxanthin) 이 있다.원래는 붉은 색이나 조직내에서 단백질과 결합하여 청록색을 띄며
가열하면 단백질이 변성분리되어 붉은 색인 아스타신(Astasin)으로 변하여 어떤 게라도 삶으면 붉은 색으로 변하는게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같은 속의 게인 대게와 붉은 대게의 구별이 쉽지않은데 ,

이의 구별에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배갑후측연에 있는 2줄의 과립상 둘기가
붉은 대게는 1줄로 합쳐져 있지만 대게에서는 전측연까지 2줄로 이어진다. 또한 붉은 대게에서는 갑폭의 최대부 부근의 좌우에 각 1개의 작은 가시가 있으며 ,대게에서는 이 위치에 작은 가시가 없다.

 

대상 어종이 무엇이든, 철이 바뀌면 갯가 어부들의 신경 줄은 팽팽해지기 마련이다. 계절이 바뀌어 새로 꾸며 넣은 그물에 걸려든 어획량 때문에도 그렇고, 이것도 모자라 수입산 탓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가격 때문에도 그렇다.

홍게(붉은대게)를 잡아내는 자망어부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 대게와는 달리 홍게는 연중 어획할 수 있다. 따라서 대게 금어기인 10월말까지는 수입산 방해 없이 그럭저럭 제 값을 받으니 별 탈 없다가 막상 양력 11월에 들면서 본격적인 대게잡이가 시작되면, 사정이 영 달라지니 신경이 쓰일밖에. 가격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까닭이겠다.

뿐이랴, 보름 언저리에 잡힌 ‘물게(살빠진 홍게나 대게)’를 트럭 화물칸 그득 싣고 다니며 대게라 뻥튀기하며 팔아대는 도시 뒷골목 그릇된 상인들까지 극성이니 그 맛을 본 이들에게 여지없이 천대받기 십상이다.

갯가 걸음 잦지 않은 도시인들이야, 시장기가 도는 퇴근길 김은 모락모락, 색깔까지 불그죽죽 입맛을 당기는 ‘물게’를 보면 그 싼값에 덜컥 집어 들고 오겠지만 막상 온 가족이 둘러앉아 다리 죽죽 찢어 살을 발라먹으려 하면 나오는 건 국물뿐인 가짜 ‘대게’ 맛에 어이없어 할 터. 이런 이들이 강원도에서 경북에 이르는 동해안을 찾았을 때 대게나 홍게를 보면 여지없이 고개부터 외로 돌리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반면, 홍게 맛을 아는 이들은 비싼 값에 비해 겨우 입맛만 다시게 되는 대게 대신 푸짐한 홍게를 택한다. 홍게 역시 본격적인 북풍에 맛이 드는 갑각류이기 때문이다.

 

도시 뒷골목 좌판의 ‘물게’와는 다르다  

이리 제 맛이 든 홍게를 잡아내는 자망어부들이 강원도 고성에서 경북 영덕군 강구 구석구석의 포구를 벗어나는 시간은 밤기운 여전한 여명 무렵. 배 속력을 올려 어장에 도착하면 속모를 시커먼 바다 위에 ‘써치’를 비추어 ‘어장기(漁場旗)’부터 찾는다. 

파도에 출렁대는 어선 좌우현에 바싹 달라붙은 승선 어부들이며, 오른손으로는 키를, 왼손으로는 1백촉 안팎의 갓 씌운 전등 ‘써치’를 켜든 선장까지 모두 동공을 최대한 확대시킨 채이다. GPS에 정확한 그물과 깃발의 위치를 입력해 두었지만, 동해 거센 파도 탓에 방향이 틀어지거나 약간의 위치 이동이 생겼을 터이니 시신경을 곤두세운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 어부들은 자망 홍게잡이를 일러 ‘홍게바리’라 하고, 경북 어부들은 그냥 ‘자망바리’라 하는데, 곁에서 눈여겨보면 홍게잡이는 다른 어종을 대상으로 하는 그것과 조업 모양새부터 달랐다. 자선장이라 하여 선장실에만 있는 게 아니라 뱃머리, 롤러 곁에서 ’조업선두‘를 맡는 것이다.

▲ 북풍에 제 맛이 든 홍게.

‘신기’(원줄)만 약 9백m. 지름 40cm쯤 되는 롤러가 2천2백50번 안팎을 회전해야 다 끌어올릴 수 있는 길이이고, 작업 시간만 30여분 이상 걸린다. 신기가 다 끌어올려지고 다시 10여분이 지나자 뱃머리에 달라붙은 자선장이 “홍게야!”를 외친다.

우현에 앉아 선내 롤러를 감는 어부나 우측 뱃머리에 차곡차곡 그물을 쌓고 있는 승선 어부들의 주의를 일깨우기 위함인데, 누가 되었든 일손 빠른 이가 홍게가 달라붙은 그물 곁으로 잽싸게 다가가 온통 그물로 얽힌 홍게를 대충 수습하는 식인데, 놀라운 것은 홍게가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부들이 이를 포구까지 싱싱한 채로 살려간다는 점이다. 실제로 강원도에서 경북에 이르는 동해안 횟집 수조 속에서 열심히 집게발을 움직이는 홍게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망홍게’다.

홍게는 보통 수심 7백~8백m, 깊게는 3천m의 심해에 서식하고 있어 이를 잡자면 특별히 고안한 대형 통발이라야 가능하다는 게 ‘일반인들의 일반상식’. 그러나 홍게 중에는 2백m 안팎의 바다를 좋아하는 놈도 드물지 않고, 이를 잡아내는 어부들이 바로 자망어부들이다.


“대게나 홍게나 찬바람이 나야 ‘순(旬)’이라 할 수 있다. 청게 혹은 너도대게도 마찬가진데, 적당히 짠맛에 맛을 들인 이들은 값비싼 대게 대신 홍게를 찾는다.

"일본사람들은 우리가 봐도 놀랄 정도로 ‘짠돌이’고, 더 놀랄 정도로 도사들입디다. 척 들어보고 껍질 눌러보고 척 골라내면 상품 홍게죠.”

강구 대게골목의 그것도 ‘대게전문점’ 아낙네가 대게 보다 홍게자랑을 늘어놓는다.

 

홍게 다리살엔 대게와 달리 결이 있어

포구까지는 용케 살아왔지만, 손님과 눈 마주친 홍게는 곧바로 미적지근한 민물 맛을 봐야한다. 맛만 보는 게 아니라 실은 민물에서 익사를 당한다. 다른 갯것과 달리 홍게는 살린 채 물에 넣어 끓이거나 삶으면 내장이 쏟아져 나와 제 맛을 잃거나 다리가 쉽게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란다. 홍게는 숨이 멎으면 곧 뒤집어 놓는다. 이 역시 귀한 맛인 내장을 제대로 보존하면서 조리하기 위해서다. 옛 방식을 응용해 만든 찜통에서 꺼내 든 홍게는 눈요기로도 그저 그만이다. 특히, 뱃바닥이 온통 붉은 색이 도는 것이 대게와 다른 점이다.

▲ 귀항 후 질 좋은 홍게는 누구 손을 타는지도 모르게 팔려나간다.

한편, 홍게요리에 노련한 강구 아낙네들은 찜통에 불을 켜둔 채 홍게를 꺼내지 않는다. ‘뜸’을 들이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거죽을 통해 비치는 내장 등의 색이 짙게 변해 보기에도 좋지 않을뿐더러 자칫하면 특유의 비린내가 날 수도 있음이다. 하여 불을 끈 채 나머지 온기만으로 몇 분간 뜸을 들인 뒤라야 손님상에 올린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이렇게 뜸이 든 놈 중 한 마리만 큼직한 접시에 올려놓아도 말 그대로 잔칫상. 살 바르기에 온갖 도구까지 갖추어 주는데, 바다가재 전문점에서 흔히 보는 것들이다. 그래도 어찌 할 줄 몰라 가위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 음식점 아낙네가 손님상 앞으로 냉큼 건너와 순식간에 해체를 해준다. 남은 일이라곤 맛있게 먹는 것뿐. 

 

대게에 비해 맛도 떨어지지 않고, 껍질에 들어찬 속살이나 내장도 실한데 아쉬운 것은 대게 다리처럼 속살을 쏙쏙 빼먹는 재미가 없다는 정도. 다리 살이 통째로 빠져 나오는 대게와는 달리 홍게의 그것은 중간에 결이 있어 툭툭 잘라지기 때문이다.

‘게눈 깜짝 할 사이’에 다리 살을 발라먹은 뒤 몸통을 두고 ‘어쩔까’ 싶어 주방을 보고 있으면, 강구 아낙네가 또 한번의 손맛을 보태준다. 등껍질 안쪽에 붙은 살과 내장을 알뜰살뜰 발라내고, 푸짐한 내장을 샅샅이 덜어내 여기에 참기름과 실파며 당근을 넣고 약한 불에 볶아낸 ‘장비빔밥’. 껍질에 담아 내오는 이 장비빔밥 차례가 되면 몇 사람이 한 자리에 앉아있든 “허!” 하는 감탄사뿐이고, 게 껍질에 닿는 수저 소리뿐이다.

▲ 어부들은 귀항 중에도 선도 유지 정도가 아니라 산채로 팔기 위해 그물에 얽힌 홍게를 골라낸다.

찾아간 때가 ‘술시(時)’면 ‘홍게매운탕’을 청한다. 고추장도 모자란 듯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집된장으로 간을 맞춘 뒤 여기에 온갖 싱싱한 계절 야채를 넣어 끓여내는 이 ‘홍게매운탕’도 역시 대게의 그것 부럽지 않은 맛. 특히 소주 안주로 그만인데, 시원한 맛을 더해 비위가 가라앉아 좋다는 게 ‘강구 술꾼’들의 추천이다.

 

한편, 이런 홍게 껍질에는 건강에 온 신경을 쏟는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키토산’이 그득하다. 10여년 전만 해도 통발에 대량으로 잡혀 살만 빼내 일본으로 수출하거나, 혹은 몇몇 수산가공식품의 원료 정도로 쓰이고 남은 그 껍질 처리에 애를 먹었으나 이제는 효자노릇까지 하는 것이다.

온갖 매스컴에 오르내리면서 잘 알려졌듯, 홍게는 갑각류 중에서도 키토산을 가장 많이 함유했음인데, 이를 주재료로 하여 만들어낸 키토산은 당뇨며, 암 치료제로 혹은 지방간에 고혈압 등 성인병의 예방과 치료제에서 심지어는 기능성 음료와 ‘키토산 양말’까지 등장하게 했음이다

 

 

대게

대게=다리모양이 대나무처럼 미끈하게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대게의 대자가 큰대자가 아니다.

암컷 대게 불법포획 기승  ,,올 위반 작년대비 51% 증가 59건… 어족 고갈 악순환 

 
동해안 바닷고기의 모태가 되고 있는 암컷 대게 불법포획이 기승을 부리면서 동해 연안 어족자원 고갈의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다.

정부는 바닷고기의 모태가 되는 암컷대게의 보호를 위해 지난 4월 수산자원보호령을 수산자원관리법으로 대체하고 암컷 대게 및 9㎝ 이하의 몸길이 미달 수컷 대게 포획 시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 처벌을 강화하고 나섰다.

또 불법 포획한 대게 암컷 및 몸길이 미달의 대게를 소지 및 유통, 가공 및 보관 또는 판매하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도록 하고 있다.

특히 동해안에서는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 12월 1일부터 이듬해 5월 31일까지만 대게의 포획이 가능하고 그 이외의 기간에는 대게를 잡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고유가와 어획 부진, 경기침체 등으로 대게의 불법 어업이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올해 들어 대게의 불법 포획 및 판매 등으로 적발된 위반사범이 59건으로 지난해 39건에 비해 51%인 20건이 증가했다.

실제로 지난 18일 오후 4시쯤 강릉시 옥계면 금진항에서 포획이 금지된 대게 암컷과 몸길이 미달 대게 총 2180마리(시가 1900만원 상당)를 트럭에 보관하고 있던 김모(55)씨가 동해해경에 의해 수산자원관리법 위반 혐의로 검거하기도 했다.

동해해양경찰서 관계자는 “어민 등을 대상으로 대게의 불법 포획은 자원고갈의 악순환을 가져오고 합법 어업자들까지 어획부진을 겪게 됨을 지속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나 근절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동해/전제훈 jenews@kado.net 

 

 

킹 크랩

대게는 우리나라에서도 잡히지만 킹크랩은 거의 모두 수입이다. 대게는담백하면서 달짝지근한 맛이있고 킹크랩은 일단살이 큼직큼직 하게많아서 푸짐하고 씹히는맛이 일품이다. 

영덕 대게의 대자는 대게의 다리 마디가 대나무 마디와 흡사하여 대게라고 불린다고 한다.  대게의 다리는 10개이며 물맞이게 과에 속하며.

킹 크랩은 다리는 8개 이며 , 다리가 8개인 게의 종류는 소라게 로써 킹크랩은 소라게의 일종이다.  킹크랩은 왕게과에 속하며 일본어로 다라바 가니라고 불리운다고 한다.  대구가 많이 잡히는 바다에 킹크랩도 많이 잡히기 때문에 다라바 가니라고 불리워졌으며 ,다라는 대구란 뜻,,

러시아산 킹크랩

 

"한-러 불법어업 방지 협정 체결 러시아 극동 해역에서 킹크랩 보호 노력 결과 킹크랩의 개체수가 다소 회복됨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킹크랩 어획 한도를 내년부터 28% 늘리기로 했다고 러시아 당국이 14일 밝혔다.

   현재 킹크랩 어획 쿼터는 지난 2007년의 5분의 1 수준인 1천143t인데 이를 1천460t으로 늘리면 러시아 킹크랩의 대일 수출 감소세가 멈출 수 있다.

   한편 러시아연방수산청의 한 대변인은 불법조업으로 잡힌 킹크랩이 일본 항구들을 통해 한국으로 유입된다며,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킹크랩 불법조업 방지 협약을 러시아와 맺을 것을 촉구했다.    ybr053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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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사러 가면서 왕릉들러 사진 좀 찍고 ,게 한상자 사가지고 와서 아들네 가족과 포식을 한 날이다.  사진 올리며  나도 몰랐던 상식도 찾아보며

함께 블로그에도 붙여 보았다 ,, 블로그 님들 새해에도 모두모두 복 많이 받으십시오..  들꽃핀 풍경 블로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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