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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총 맞은 5살 아이 유골 등 와르르..성벽 돌마다 `아픈 역사`

by 윤라파엘 2015. 9. 23.
조총 맞은 5살 아이 유골 등 와르르..성벽 돌마다 `아픈 역사`
http://media.daum.net/v/20150923221008533

출처 :  [미디어다음] 문화생활 
글쓴이 : 한겨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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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 맞은 5살 아이 유골 등 와르르..성벽 돌마다 '아픈 역사'


[한겨레]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③ 동래왜성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건설현장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조선시대 동래읍성 주위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 방어시설 '해자'가 발견된 것이다.

경남문화재연구원은 곧바로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성곽을 따라 땅을 길게 판 해자에선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과 투구, 환도, 창, 화살촉 등 전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전쟁의 처참한 흔적이 남아 있는 사람뼈였다. 해자 밑바닥에선 남자 59명, 여자 21명, 어린이 1명 등 모두 81명의 뼈가 발굴됐다. 이 가운데 8명의 두개골에선 칼에 베이거나, 활이나 총, 둔기 등에 맞은 흔적이 드러났다.

 

 


2005년 부산 수안역 건설현장서
동래읍성 전투 81명 유골 나와
탄환에…칼에…처참하게 스러져
함락시킨뒤 그 돌로 왜성 쌓아

뒤쪽에 구멍이 뚫린 20~40대로 추정되는 남자의 두개골, 두 차례나 칼로 잘려나간 흔적이 남아 있는 20대 여성 두개골 등이 발견됐다. 총이나 활이 관통한 5살가량 어린아이의 두개골도 나왔다.

고고학계는 발굴된 사람뼈의 평균키와 생김새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이들은 모두 조선인이며, 1592년 4월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 상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밝혔다. 임진왜란 유적에서 처음으로 사람뼈가 나온 것이다. 임진왜란 전 조선군 보급물품과 일본 창이 발견됐다는 점도 임진왜란의 전투 흔적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학계는 "5살가량 어린이 두개골에서 확인되는 상흔과 경사도, 깨진 정도를 종합하면 왜군의 조총 탄환이나 유탄을 맞아 숨진 것으로 보인다. 20대 여성의 전두골은 칼로 예리하게 잘려 있고, 두정골에도 칼로 베인 흔적이 있다. 각도를 볼 때 고개 숙인 여인을 왜군이 칼로 내리친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왜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스러져간 조선 백성들의 주검이 동래읍성 해자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이다. 잊혀진 조선 백성들은 이렇게 400여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 동래읍성 전투

왜군은 부산진성을 함락한 다음날인 1592년 음력 4월15일 부산의 국방·행정 중심지이던 동래읍성에 이르렀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동래읍성 남문에 올라 성문을 굳게 닫고 전투준비를 했다.

그러나 경상좌도의 육군사령관 격인 경상좌병사 이각은 구름같이 몰려드는 왜군을 보고 "나는 대장이니 성 밖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송 부사는 이곳을 지키시오"라며 성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부하들도 "일단 물러나서 험한 지형에 의지해 적을 막자"고 건의했다.

"성주가 성을 지키지 않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송상현 부사가 일갈했다.

경남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성이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동래읍성에 도착했다. 하지만 수영구 수영동에 있던 경상좌수영의 좌수사 박홍은 울산 언양 쪽으로 물러났다. 나머지 고을이나 진성에서도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왜군은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내달라"고 했고, 송상현 부사는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고 맞받아쳤다.

전투를 시작하고 반나절 만에 왜군은 동래읍성 동북쪽 성벽을 파괴하고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송상현 부사는 동래읍성 함락 직전 조복(관원이 조정에서 임금에게 하례할 때 입는 예복)으로 갈아입고 선조가 있는 북쪽을 향해 네번 절을 한 뒤 "달무리처럼 포위당한 외로운 성/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는데/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정은 가벼워라"라는 시를 남기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동래읍성 백성들도 힘껏 싸웠다. 백성들은 낫과 도끼 등 농기구를 들거나 맨주먹으로 왜군에 맞섰다. 아녀자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뜯어 왜군에게 던졌다. 동래읍성을 점령한 왜군은 백성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렇게 동래는 '충절의 고장'이 됐다.

■ 동래왜성

왜군은 동래읍성을 함락시킨 뒤 동래읍성 동헌에서 동쪽으로 700여m 떨어진 구릉 꼭대기에 동래왜성을 쌓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했던 깃카와 히로이에가 이 왜성을 만들어 머물렀다.

동래왜성 터는 현 동래읍성 동장대를 축으로 동남쪽에 있는 충렬사(부산시지정 유형문화재 제7호)까지 비스듬하게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부산 동래구 칠산동과 안락동에 걸쳐 있다. 현재 동래왜성은 터만 남아 있어 1곽만 확인되고, 나머지 곽은 구분이 어려운 상태다. 동래왜성 일부 구역은 충장대로 건너편 남쪽에 있는데,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1446년(세종 28년) 세워진 동래읍성을 파괴해 석재를 조달했다. 조선은 1731년(영조 7년) 옛 동래읍성의 6배 규모로 새 동래읍성을 건설하며 동래왜성 성벽의 돌을 가져다 사용했다.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옛 동래읍성의 돌을 재활용했고, 조선은 새 동래읍성을 쌓으며 동래왜성의 돌을 또다시 재활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 동래왜성에 석축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산책길을 따라 충렬사 뒤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길 양쪽에 편편한 공간들이 계단식으로 배치돼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병사를 배치해 성을 방어했던 '곡륜'으로, 왜성 터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동래왜성 2곽 추정 지역을 지나 구릉 꼭대기로 올라가면, 1곽이 나온다.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에 새 동래읍성의 동장대가 세워졌다. 동장대 동쪽 비탈엔 30~40m 길이의 해자가 보인다.

1979년 동장대 복원공사 당시 이곳에서 조선 기와가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에 돌아가 세운 구마모토 무기시마(麥島)성 천수각에서 같은 제작틀로 만든 기와가 출토됐다. 나 팀장은 "동래에서 가져간 것을 본보기로 만든 기와를 일본성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조때 다시 왜성 성벽 돌 재활용
옛 동래읍성 6배 규모로 건설
동장대서 나온 조선 기와 모양
왜군이 일본 돌아가 본떠 쓰기도

동래구 칠산동으로 내려가는 길에선 새 동래읍성의 문 가운데 하나인 '인생문'이 보일 듯 말 듯 하다. 인생문이라는 이름 유래는 임진왜란 당시 인생문 고개를 통해 도망간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기 때문이라는 설과,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에서 죽은 주검들을 성 밖 묘지로 옮기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인생문은 1731년 영조 때 만든 새 동래읍성에 딸린 문으로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과는 관련이 없다. 임진왜란 때 억울하고 처절했던 조선 백성 사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내용이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 동래구는 2005년 3월 11억원을 들여 인생문을 복원했다. 그런데 지난 17일 내린 비로 인생문 안쪽 성벽과 담장이 무너졌다. 400여년 전 전쟁 중에 손으로 쌓은 성벽보다 부실하게 복원한 것이다. 재복원 공사는 내년 1월에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부산의 한 고고학자는 "부산시와 동래구는 칼로 잘라 벽돌처럼 만든 돌로 성벽을 쌓은 뒤 '동래읍성을 복원했다'고 홍보하고 있다.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나은 보존일 듯하다"고 비판했다.

김영동 기자ydkim@hani.co.kr, 도움말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사진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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