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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풍경 종합

부산박물관

by 윤라파엘 2011. 2. 28.

비내리는 봄날 실내 구경꺼리

2011.2.27

지난날 부산의 온갖 것을 다 볼수 있는 곳 ,, 부산박물관 전시실 이모저모

 

 

 선사시대 출토유물관

 

 고래뼈

 

 

 조개팔찌

 

 

돌도끼

 

 

돌로만든 칼 - 돌을 가지고 어떻게 정교하게 만들었는지 놀랍다.

 

철기문화 유물

 

 

 

성형문화 소개 

 

 

 

 

 

 

선사시대 유물관 입구의 원인류 상

 

 고려시대

 

 

만덕사가 이렇게 큰 사찰 이었다는것이 흥미롭다

 

 

 

 

정과정이 뭘까???

정과정곡(鄭瓜亭曲)이란 무엇인가?
우리말로 적혀 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유일하게 작자를 알 수 있는 작품으로, 우리나라 가사문학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충신연주지사' 및 '유배문학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작품으로 고등학교 교과서에 올라있다.

정과정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정과정(鄭瓜亭)은 고려시대 문신인 정서(鄭敍)가 유배생활을 할 때 정자를 짓고 오이밭을 일구며 임금을 그리워하는 고려가요인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곳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래부지(東萊府誌)> 등에 의하면 과정(瓜亭)은 '동래부(東萊府) 남쪽 10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자는 없으나 그 터는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추정해 보면 정과정의 현재 위치는 수영강변을 따라 수영하수처리장에서 고려제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일대 대부분의 지역은 개발 등으로 인해 원 지형을 찾기 어려우며, 망미2동 산6-2번지 일원 약 1,240평 정도만이 원 지형을 간직한 녹지로 남아 있다.

정서(鄭敍)

정서(鄭敍)는 고려 인종때 문신으로 호는 과정(瓜亭), 벼슬은 내시낭중(內侍郎中)에 이르렀고 인종의 왕비인 공예태후(恭睿太后)의 여동생 남편 으로서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며, 문장(文章)에 뛰어났다.

인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의종도 잘 받들어 섬겼으나 나쁜 신하의 모함에 빠져 의종 5년(1151년)에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1170년(명종 즉위)에 풀려나와 다시 벼슬에 올랐다. 6년간 귀향살이를 하는 동안 지금의 수영강 부근에 집을 짓고 늘 거문고를 친구삼 아 임금님을 그리워하는 정을 담은 「정과정곡」이란 문장(가요)을 남겼다.


「정과정곡」이란 고려시대 정서(鄭敍)가 지은 고려가요의 하나로서 일명 삼진작(三眞勺)이라고도 하며 동래 유배생활중 에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사(歌詞)로 지어 불렀다는 10구체 향가 형식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가요가 궁중아악(宮中雅樂)으로 많이 불리었고 국문학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가사는 악학궤범 (樂學軌範)에 실려 전하고 있다. 정서(鄭敍)의 유배지인 정과정(鄭瓜亭) 옛터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동래현 남쪽 10리 지점으로 현재 연 제구 연산9동 지역내 온천천과 수영강이 합류되는 지점이라는 설이 있다.
출처-연제구청 우리고장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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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정곡

내 님믈 그리사와 우니나니(내 그대를 그리워 우니)

山 졉동새 난 비슷하요이다.(산 접동새와 난 비슷하구나)

아니시며 거츠르신 줄 아으(억울하며 거짓인 것을 아으!)

殘月曉星이 아라시리이다.(잔월효성이 아시니)

넉시라도 님은 한대 녀져라 아으(넋이라도 그대는 함께 있으나 아으!)

벼기시더니 뉘러시니잇가.(벼르시던 이 누구인가?)

과도 허물도 천만 없소이다.(과도 허물도 천만 없소이다.)

말힛마리신뎌(말들이 많아지니)

살읏븐뎌 아흐(살얼음판 같구나 아으!)

니미 나랄 하마 니자시니잇가(그대여 나를 벌써 잊으려고 하시는 구려)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그대여 돌이켜 들었던 것을 거두어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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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의 내용은 자기의 외로운 신세를 산접동새에 비기어 임금을 그리는 절절한 심정을 읊었으므로

 '충신이 임금을 그리는 노래(忠臣戀主之詞)'라 하여 궁중음악으로 불렸다.

이 노래는 <동국통감>에는 <정과정>이라 하였고, <악학궤범>에는 <삼진작(三眞勺)>이란 이름으로 실렸는데

이 삼진작이란 이름은 정과정에 붙인 악곡명이고, 가사명은 아니다.

즉 <삼진작>은 가사에 붙인 곡조 이름이다. 일진작이 가장 느리고, 이진작보다 삼진작이 더 빠른 것으로 보인다.
자료인용-http://www.walkview.co.kr/474

왼쪽이 만덕사지 3층석탑

 

 

 정5품의 벼슬을 내린 교지

 

 

 

구슬과 화폐=통보

 

 

아래 백자청화 묘지 

 

 

 

 

산수도병풍

 

금전산 산성도

 

 

봉수대 조형

 

 

 

 

조선통신사 행렬묘형

 

수고하는 쪽은 모두 일본인이고 가마나 말에 앉아가는 조선사절단

 

 

 

 

 

 임진왜란 해전

 

 화살촉

 

 

임진왜란

 

 

 

 

시무(時務)를 아뢰는 차자(箚子) - 임진년(1592, 선조25) 11월 정주(定州)에서

금일의 사세는 이미 십분 위험과 핍박이 이르러 다시 손댈 곳이 없습니다. 오직 중국 구원병이 오기를 날마다 바라고 있으나 늦어져서 오지 않는 가운데 벌써 세모가 다가왔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가 중국을 위하여 충성을 바친 것은 이미 지극하였습니다. 이번에 화란을 당한 것도 생각한다면 중국 때문인데, 중국이 급히 서로 구조하지 아니하여 천하의 난리를 열었습니다. 가령 중국에 인물이 있어 일을 도모하였다면,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순안(順安)에서 용천(龍川)에 이르는 사이에는 공사로 저장한 것을 다 모은 양곡이 거의 수만여 석입니다. 오직 하루아침에 왜병이 졸지에 내려온다면 다시 왜적의 군량이 될까 걱정입니다. 하물며 우리 군대는 앉아서 먹는 자들이 날마다 양식을 소비함이 매우 많습니다.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다니는 사람이 길에 연이어, 한 도(道)의 사력(事力)이 더는 털끝만큼이라도 남음이 없으니, 이런 형세에 미루기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원하건대 신은 이런 사정을 중국 장수에게 명백하게 말해 주어 그 결단하는 말을 듣고 여러 장수를 지휘하여 군정(軍情)을 통일함으로써, 미루고 기다리는 뜻을 없게 하여 죽음에서 삶을 구하는 계책을 삼으심이 좋겠습니다.
또 신이 진달할 일이 있습니다. 국가의 일이 위급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만에 하나라도 믿을 희망은 인심입니다. 인심이 만약 와해된다면 더욱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무릇 군공과 작상 및 면천과 면역 등의 일을 모두 획일적인 규정을 만들어 유사가 그날로 시행함으로써 옛사람이 ‘상을 줌에 때를 넘기지 않는다.’는 뜻에 맞게 하소서.
그리고 군대와 민간인으로 왜적을 잡아 얻은 것은 다소를 막론하고 비록 금옥ㆍ금수(錦繡)ㆍ우마라도 왜적을 잡은 사람에게 즉시 주어 관이나 또는 남이 빼앗지 못하게 한다면, 어리석은 백성들도 일신의 이익이 왜적을 죽이는 데 있음을 알고 다투어 일어나 왜적을 쏠 것이니, 적의 형세는 거의 적어지며 쇠약해질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방백들이 혹시 왜적을 잡아 얻은 것을 평상시에 도둑의 장물 예와 같이 처리하여 반드시 상사(上使)케 하고, 만약 원래 보고한 수에 차지 못하면 담당자를 가두고 독촉하여 징수하니, 간혹 자기의 물건으로 대충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전해 가며 경계하기를 “다시는 왜적을 잡지 말자.” 한다 합니다. 원컨대 신은 속히 여러 고을에 유시를 내려 전자에 아뢴 대로 정하여 떳떳한 법식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원도는 경상ㆍ함경 두 도의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에 산림이 험하여 도내의 군정(軍丁)은 비록 많지 않지만, 산골짜기에서 사냥으로 생업을 삼는 산척(山尺)이라 하는 사람의 수가 적지 않습니다. 만약 많은 상으로 사 모으고 그 집안 권속을 넉넉히 구제하여 흩어져 있으면서 복병이 되어 낮이나 밤에 출몰하여 토벌한다면 북로(北路)로 왕래하는 적은 머리와 꼬리가 끊어지니 동남의 형세가 서로 통할 수 있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서울을 수복하는 형세는 역시 3개의 진로로 나누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양주, 포천, 적성, 영평(永平), 가평 등 여러 고을의 군대를 고언백(高彦伯) 같은 한 장수에게 소속시켜 동쪽을 차단하고, 교동(喬桐), 강화, 고양, 교하 등 여러 고을 군대도 하나의 장수에게 소속시켜 서쪽을 차폐하며, 한강 이남의 광주, 과천, 수원 등 여러 고을의 군대도 하나의 장수에게 소속시켜 남쪽을 차단합니다. 3방면의 군대가 합세하여, 서로 호응하여 적이 적으면 군대를 나눠 복병을 설치하고, 적이 많으면 군대를 합하여 공격 토벌합니다.
또한 중신을 시켜 그 지역에 절제(節制)로 통행하게 함으로써 의병과 관군이 서로 흩어지지 못하게 하고, 진퇴와 지속(遲速)을 함께 한 뒤에야 형세가 장성(壯盛)하여 왜적을 비로소 도모하겠습니다. 따라서 강원도의 군대는 동쪽의 군대와 합세하고, 강화의 의병은 서쪽의 군대와 합세하며, 충청ㆍ전라의 군대는 남쪽의 군대와 합세합니다. 그래서 혹은 그 앞에서 유인하고, 혹은 그 뒤에서 공격하여 기회를 보고 편리함을 이용하며 마음을 가지런하게 하고 힘을 하나로 뭉쳐 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여든다면, 적은 그물 속에 걸린 토끼와 같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경성 안에서도 반드시 내응하여 왜적을 도륙할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들으니, 곳곳의 의병들이 각기 향리를 그리워하며 각각 진 치고 모여 오직 날마다 두세 놈의 영세한 왜적을 포박하고는 글을 올려 승리라고 보고하였으나, 일찍이 큰 적을 한 번도 짓밟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관군과 의병은 판연하게 나뉘어 전진하여도 함께 전진하지 아니하고, 패하여도 서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성세(聲勢)가 외롭고 약해져 날마다 흩어져 없어지니, 결국 적을 없앨 기회가 없습니다. 옛날 당 나라 시대에 의거한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같은 사람은 진실로 그 절제를 본디 이광필(李光弼)과 곽자의(郭子儀)에게 받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어찌 의병은 저대로 의병이 되며 관군은 저대로 관군이 되겠습니까. 지금은 이광필과 곽자의가 없음을 근심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흩어져서 합하기 어려운 형세를 분별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변란이 생긴 이래로 한 사람도 국난에 죽은 신하가 없고 모두들 달아나 도망하는 것으로 계책을 삼았습니다. 심한 사람은 도내(道內)의 정병을 모아 스스로 자신을 호위하다가 적이 온다는 보고만 들으면 먼 곳으로 도피합니다. 이 역시 급히 계칙해서 상과 벌을 가한 연후에야 인심이 거의 숙정(肅正)하고 권장하게 될 것입니다.
경상도는 적병의 연수(淵藪)입니다. 듣건대 ‘그곳의 인심은 적을 토벌하는 데 매우 떨쳐 일어나지만, 단지 큰 흉년이 들어 군량과 백성의 양식이 텅 비어 남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만약에 경상좌도가 붕괴된다면 경상우도를 보전할 수 없고, 경상우도가 붕괴된다면 호남을 보전할 수 없으며, 호남이 붕괴된다면 충청도도 차례로 적의 침략을 받으니, 팔방에 한 치의 말끔한 땅도 없게 될 것입니다. 금년에 전라도는 매우 풍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호남의 곡식을 차례로 수송하여 영남우도를 구제하고, 또 좌도와 서로 돕게 하시며, 또한 별도로 곡식을 모집하는 관리를 두어 시급하게 구분 처리하여 많은 사람이 죽는 시급함을 구제한 뒤에야 남방을 거의 보전할 것입니다.
사방에서 오는 변방의 보고에 응수하는 일도 일각일각이 매우 급합니다. 옛날 진(秦) 나라 때에 일을 보고하는 사람이 사마문(司馬門)에 3일 동안 머무르자 식자들이 진 나라가 망할 줄을 알았습니다. 원하옵건대 신은 오늘 변방의 보고도 마련되는 즉시 시행하여 하루 이틀을 넘기지 않게 하시고, 그래도 부족하다면 밤까지 계속함이 좋겠습니다.
또한 적은 표독하고 난폭하여 삶을 가볍게 여겨 돌격전에 능하고 철환(鐵丸)과 창검이 모두 예리한 기구라 우리 군대가 당할 수 없습니다. 사방에서 군대를 주관하는 사람들도 형세를 이용하여 유리한 데로 인도하지 못하고, 언제나 오합지졸을 모아 많은 것으로 귀함을 삼으며, 약속한 날에 천천히 달려가되 망을 보는 데 자세하지 못하고, 척후도 멀지 않습니다. 그리고 적의 간첩은 매우 많아 이목(耳目)이 사방에 흩어져 있으니, 우리의 동정을 저들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군사는 언제나 싸우기만 하면 매양 패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정예한 군사를 뽑아 그 복색을 섞어 입히되 자기 편만 서로 식별하도록 하여 먼 곳과 가까운 지역에 흩어서 배치합니다. 그리고 몰래 서로 약속한 다음 혹은 낮에 혹은 밤에 출몰이 일정하지 않게 하면서 그들을 만나는 대로 공격 토벌케 하고, 또 처소도 일정하지 않게 하여 적으로 하여금 우리 군대의 다소를 헤아리지 못하게 하소서. 서울 같은 곳도 사방 수십 리 이내에 모두 이같이 하소서. 성내에 이르러서도 역시 계책을 세워 불을 지르며 겁을 주어 적이 어수선하여 주야에 휴식하지 못하게 한다면 10여 일이 지나지 못하여 적의 기세가 크게 꺾일 것이니, 이보다 더 나은 계책은 없습니다.
강화의 의병과 관군의 경우는 바다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 헛되이 군량만 소비하고 벌써 늙은 군대가 되어 세모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한 발짝도 섬 밖으로 나와서 대적하여 싸운 적이 없으니, 이는 바로 피란하는 군대이지 국가를 회복하려는 계책이 아닙니다. 또 최원(崔遠)의 군대는 몸에 짚과 풀을 덮고 얼굴에는 사람의 빛이 없으며 여러 달을 굶고 얼어 강시(僵屍)가 서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최원같이 용렬한 사람은 본래부터 공적을 바랄 수 없었고, 조정에서도 또한 구분하여 처리하지 아니하여 죄 없는 군사가 스스로 점점 다함에 이르러도 살펴 주휼하지 않으니, 만약 사방에서 전해 듣는다면 어찌 다시 근왕을 위해 힘쓸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경성에 있는 왜적도 반드시 들으면 웃고 업신여길 것이니, 신은 적이 가슴 아픕니다.
전자에 들으니, 전라 감사 권율(權慄)도 역시 군대를 아산에 주둔한 지 오래되었으나, 수원에 왜적이 있음을 듣고도 전진하지 못한다 하더니, 근자엔 군대를 서쪽으로 이동한다 합니다. 감사는 한 도를 주관하는 관리인데 임지를 이탈하여 멀리 나왔으니, 역시 좋은 계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올라왔으니, 또한 신이 아뢴 것과 같이 먼저 정병을 뽑아 맹장에게 나누어 배속시켜 경성의 왜적을 토벌하여 죽임으로써 국내의 명성을 장하게 한다면 역시 근왕의 한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전일의 거조(擧措)와 크게 다름이 없는 듯하니, 이는 형세와 군대의 일을 알지 못한 과실입니다.
신이 보건대 여러 장수 가운데에서 오직 고언백만은 자못 국가를 위하는 마음이 있고 게다가 계획이 있으나 권력과 책임이 중하지 못하여 양주 한 고을의 군대만을 관장할 뿐이므로 결국 이룬 것이 없습니다. 이제 무장 중에서 벌써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흔히 몸을 아끼며 편함을 점치고 국가를 위하여 일 맡기를 달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직 평상시의 규정에 구애받지 말고 옛사람이 이른바 “졸개를 뽑아서 장수로 삼는다.”는 말같이 하심이 마땅합니다. 홍계남(洪季男) 같은 자는 이미 당상관이 되었으나 또한 조방장(助防將)이란 이름을 빌려 주어 그로 하여금 힘을 합하여 공격하게 함도 불가함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왜적과 우리 백성이 성에 섞여 거처하므로 거의 서로 잊고 있으니, 이 형세를 이용할 만합니다. 만약 잘 계획하여 밤을 이용해서 공격하되 안팎이 서로 응하고 몇 개의 고을이 함께 발동한다면 함흥의 소굴에 있는 적 따위도 소탕하여 뒤집어 엎을 수 있고, 그 나머지 군사도 차례로 평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먼저 영세한 적을 잡음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사실을 알아서 미리 대비하게 하였고, 각처의 관군도 서로 둘러앉아 보기만 하고 힘껏 싸우지 아니하니, 특히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고 신이 듣건대, ‘송언신(宋言愼)이 남도로 들어갈 때부터 백성들이 순찰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원근 사람이 모두 모여 그 수가 매우 많았다. 그런데 오래지 못하여 죄 때문에 면직되자, 도내의 민심이 의지할 데가 없어서 서로 10일 동안 울부짖으며 눈물 흘린 뒤에야 해산하였다.’ 합니다. 송언신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잘잘못은 신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북로(北路)의 백성들이 오랫동안 적중에 빠져 있다가 조정의 관리가 경내에 왔다는 말을 한번 듣고는 그 장차 합세하려는데 갑자기 면직하고 또 교대하는 자도 없습니다. 비록 방어사 등의 관리가 있다 하여도 명위(名位)가 중하지 못하여 민심을 진압할 수 없으니, 신은 적이 탄식합니다. 송언신이 전에 희천(煕川)에 있을 때 여러 달 동안 지체하였으니, 진실로 그에게 죄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면직은 마땅히 희천에 머물러 있을 때에 했어야 할 것이요, 이미 그가 남도에 간 뒤에 면직한 것은 부당합니다. 때를 얻기는 어렵지만 잃어버리기는 쉽고, 일은 쉽게 지나가지만 따르기는 어려우니, 얻고 잃는 기틀의 거리가 날마다 떨어져 멀어집니다. 이런 일들의 처리는 조정이 십분 양찰하여 기회를 잃지 마소서. 이는 또한 신의 소망입니다.
신은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일찍이 황공하게 대신이 되어 국가의 일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만번 죽어도 아까움이 없습니다. 지금 아뢰는 것은 장님의 말이어서 모두가 합당하지 않습니다. 조정이 반드시 벌써 시행하였는데, 신은 미처 듣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국의 일이 하루하루 더 위태함을 볼 때 마음이 꺾이고 뼈가 끊기는 듯하여 밤낮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사소한 것은 모조리 아뢰지 못하고 삼가 그 대개만을 모아 우러러 채택에 대비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구구한 정성을 조금이라도 가엾게 여겨 보살펴 주소서. ‘즉여함흥(則如咸興)’이 어떤 본에는 ‘여함흥즉(如咸興則)’으로 되어 있음.

[주B-001]차자[箚] :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의 일종으로 일명 주차(奏箚)ㆍ차문(箚文)ㆍ방자(牓子)ㆍ녹자(錄子)라고도 한다.
[주D-001]상을 …… 않는다 : 백성의 선행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상을 제때에 시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漢書 卷84 翟方進傳》
[주D-002]상사(上使) : 상급 관청이 하급 관청에 명하여 죄인을 잡아 오게 하는 것.
[주D-003]산척(山尺) : 산속에 살면서 사냥도 하고 약도 캐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
[주D-004]장순(張巡)과 …… 받은 것은 : 장순은 남양(南陽) 사람으로 군서(群書)에 밝았고, 허원은 경종(敬宗)의 후손으로 이치(吏治)에 밝았다. 이들은 안녹산의 난에 함께 싸우다가 죽었는데, 이는 이광필과 곽자의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주D-005]연수(淵藪) : 못과 숲, 고기와 짐승이 모여드는 곳으로 사람이 모여든다는 비유.
[주D-006]진(秦) 나라 …… 알았습니다 : 진(秦)의 장감(章邯)과 항우(項羽)가 싸우는데, 진 나라 군세가 불리했다. 그래서 진 나라 이세(二世)가 장감을 질책했다. 이때에 장감은 장사(長史) 사마흔(司馬欣)을 보내 이세에게 일을 아뢰게 했는데, 흔이 함양에 도착해 사마문(司馬門)에서 3일이나 머물렀으나, 당시의 권신 조고(趙高)는 그를 만나 보지 않았다. 그후 진 나라는 곧 망했다. 《史記 卷7 項羽本紀》

 

 

 

 

 

 

 

 

 

 동래학춤

 

 

 

 

별신굿당

 

사자놀이

 

조선통신사 이동로

 

 

 

 

 

 

 

 

 

 

 

 

 

 

 구 영도다리 조형물

 

 

 

옛 부산역 모습

 

 

 옛 우체국 집배원

 

 

 

 

 

 

 

 

 

 

 

 

 

 

 

 

 

 

 

 

 

 

6.25전쟁 

 

 배급통장

 

 

 

 도민증

 

미국의 원조

 

 

 

 

 전시 학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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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이동통로에 있는 그림들,, 

 화려한 목걸이

 

 

 

십이지신 상

 

박물관 설립자  

 

 

군대 유물

 

기증유물 전시실

 

 

 

 

 

대충 보는데도 2시간 이상이 걸린다.

  

비 내리는  부산박물관 야외환경-매화꽃이 탐스럽게 피었지만 비에 젖어있다.

주변에 유엔공원이 있어 더 구경할 부분이 있는데  , 비도오고 , 또 시간이 늦어 다음에 한번

관람하기로 하고 되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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