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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s 공간/삶의 지혜

이어도(離於島)

by 윤라파엘 2014. 11. 12.

운성님의 이메일 전송자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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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도 (離於島)


세계 3대 유전지대(油田地帶)가 있는 이어도는 명백한 우리땅
이어도 관할 해양영토 규모는 우리나라 면적의 몇 십배

“대한민국 최남단 영토는 이젠 마라도가 아니라 이어도(離於島)라야 합니다!”


이어도는 한국 최남단 마라도에서 149㎞ 떨어져 있다. 제주공항에서 헬기로 50여 분 거리다.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인도인 서산다오(蛇山島·287㎞)보다 가깝다. 바다 수면 밑 4.6m 아래에 있는데, 태풍이 와서 파도가 높게 칠 때 그 모습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실제로 존재하는 섬이다.


제주 사람들에게는 이런 실체가 확인되기 이전부터 이어도는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해온 이상향이다. 현실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이자,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는 ‘환상의 섬’이었다.


이어도는 제주도민의 이상향


이어도 사나 아아아~ 이어도 사나 으샤 으샤’.
물질하러 깊은 바다로 가기까지 힘겹게 노를 저어야 하는 해녀들의 노래다. 이 처럼 맷돌·방아노래, 타작 노래, 꼴 베는 노래 등 대부분 제주지역 노동요에 이어도(‘이여도’라고 부르기도 함)가 등장한다. 이어도는 힘든 노동에 힘을 돋우는 후렴의 역할을 맡는 동시에 제주 사람들에게는 ‘꿈’이자 ‘이상향’이었다.

 

2012년 10월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이태경 기자
옛 제주사람들이 바람 많고 돌이 많은 땅에서 생활해 나가며 키워왔던 꿈, 해녀들이 물질을 하며 그리던 곳, 그곳이 바로 이어도이다.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과, 반대로 그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함께 만들어낸 이상향, 바로 이어도이다.
이어도는 제주지역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 민요 등에서 그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는 남편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는데 돌아올 줄을 몰랐다. 이 배는 풍랑을 만나 한 섬에 표류하게 됐다. 그 섬이 다름 아닌 이어도이다.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다 이어도로 떠났다는 전설도 있고, 그 남편을 그리며 이어도를 노래한다는 설도 있다.

설화 ‘남선비 이야기’도 비슷한 스토리로 흐른다. 곡식을 구하러 바다로 나간 아버지 ‘남선비’가 돌아오지 않자 그의 일곱 아들과 아내가 뗏목을 만들어 그를 찾으러 나서고, 거친 파도에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결국 섬(이어도)에 표류해 있는 아버지를 찾는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신화와 전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제주도로부터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이어도에 가기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어도는 한결같이 꿈 속의 낙원 같은 살기 좋은 곳이자 떠나기 싫은 현실적인 생활의 터전으로 묘사되고 있다. 오래 전부터 해양활동을 해온 제주도민에게는 생활의 터전이자 현실의 고통을 치유해주는 이상향으로 함께해온 것이다.

구전되는 신화와 전설 속에서 이어도(離於島)의 어원을 찾을 수도 있다. 멀리 떨어진 ‘여’ 섬(암초) 이라는 뜻을 담아 ‘이여도’로 부르고 표현했는데, 제주도 사람들에 의해 이어도란 말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도는 수심 40m를 기준으로 할 경우 남북으로 약 600m, 동서로 약 750m에 이른다. 정상부를 기준으로 남쪽과 동쪽은 급경사를, 북쪽과 서쪽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국립해양조사원 제공 


고충석 (사)이어도연구소 이사장(전 제주대 총장) 은 “제주도민들은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도 이어도 민요를 부르며 이어도란 이상의 섬을 꿈꾸었고, 그 이상향을 향한 동경속에서 현실의 고난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도는 최근에는 제주 출신 양종해 시인의 시 ‘떠나가는 배’, 고은 시인의 시 ‘이어도’, 이청준 소설 ‘이어도’ 등 현대문학을 통해 등장하기도 했다. 이청준은 이어도를 ‘긴긴 세월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서술했다.

문학작품 속의 이어도는 제주 사람들을 넘어 이상향을 동경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가서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51년 대한민국 영토로 첫 인정 그렇다면 이어도의 실체가 제주 사람들 마음 속에서 나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언제일까.

이어도는 우리 고문헌과 지도 속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700년대 초기의 ‘제주지도’, 1750년(영조26년) 쯤에 제작된 ‘해동지도 중 제주삼현도’, 1770년대의 ‘제주삼읍도총지도’, 1822년 ‘환영지중 탐라도’, 1841년 이원조가 제작된 ‘탐라지도병지’ 등의 지도와 ‘탐라순력도’ ‘남환박물’ ‘일본서기’ 등 고문헌에 ‘여인국’ ‘여도’ ‘제여도’ ‘유여도’ 등의 이름으로 나온다.

 

이어도는 ‘하멜표류기’에도 등장한다. 하멜은 1653년 7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의 무역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타고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도중 태풍을 만나 제주도 서귀포 인근 해안에 표착한 인물이다. 그가 제작한 동아시아 해역 항해도에는 이어도로 짐작되는 섬이 ‘Oost’라고 표기돼 있다. 이 지점을 보면 그 위치가 현재의 이어도와 일치한다.


국립해양조사원에 따르면 이어도가 국제적으로 다시 한번 조명된 것은 1900년 영국 상선인 소코트라(Socotra)호에 의해 발견되면서였다. 이 때부터 이 선박의 이름을 따서 ‘소코트라 암초(Socotra Rock)’로 부르기도 했다. 이후 1910년 영국 해군 측량선 워터 위치(Water Witch)호에 의해 확인됐다.

1938년에는 일제가 이어도에 직경 15m, 높이 35m 규모의 해저전선 중계시설과 등대시설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실행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와 해양영토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기 시작하면서 자주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이어도에 대한 실재론이 등장한 것은 1951년 9월10일이다. 당시 국토규명사업을 벌이던 한국산악회와 해군이 공동으로 이어도 탐사에 나서 높은 파도 속에 실체를 드러낸 이어도 섬 꼭지점을 눈으로 확인했다.

당시 탐사팀은 ‘대한민국 영토, 이어도’라고 새긴 동판 표지를 수면 속 이어도에 가라앉히고 돌아왔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 당시 1952년 1월 18일 국무원 고시 제14호로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을 선언한 평화선 선포수역 내에 있어 우리나라의 해양관할권에 속했었다.

그 후 1984년 3월 ‘KBS-제주대 파랑도 탐사반’이 이어도에 대한 대대적인 해양탐사 작업을 진행해 이어도의 존재를 다시 확인했다. 1986년에는 수로국(현 국립해양조사원) 조사선에 의해 암초의 수심이 4.6m로 측량됐다.

이어도 최초의 구조물은 1987년 해운항만청(현 해양수산부)이 설치한 ‘이어도 등부표’(선박 항해에 위험한 곳임을 알리는 무인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항로 표지 부표)를 설치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공표했다. 1990년대 후반 ‘한·중 어업협정’ 체결 교섭과정에서 이어도 주변 수역이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제주도가 이어도에 ‘제주인의 이상향(理想鄕) 이어도는 제주땅’라고 새긴 수중표석을 세우기도 했다.


이어도 주변은 황금어장

이어도가 최근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가 주변 해역이 연중 황금어장이라는 것이다.

북상하는 쿠로시오 해류와 남하하는 서해의 한류, 중국 대륙의 연안수가 서로 교차하는 곳이라 물고기의 먹이가 되는 플랑크톤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고등어, 조기, 민어, 갈치, 도미, 장어 등 우리나라 국민들이 즐겨먹는 생선 어류들의 서식처이자 산란장이다. 현재 우리나라 어선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어선들의 조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해양영토 이어도의 중요성과 미래가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독도는 동해라는 바다에 갇혀 있는 섬이지만 이어도는 태평양과 연결되는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의 중심에 있다. 따라서 이어도가 관할할 수 있는 해양영토의 규모는 우리나라 면적의 몇 십배가 된다.

이어도 주변 해역은 대한민국이 설정한 제4광구에 속한다. 이 곳에 원유매장추정량은 77억t으로 세계 3대 유전지대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 천연가스와 원유 등 230여 종의 풍부한 해저 자원이 매장돼 있는 자원의 보물 창고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어도는 태풍의 길목에 위치해 있어 태풍을 실시간으로 파악해서 예보함으로써 얻어지는 돈은 수십조원에 이르며 이어도 항로는 한국의 해양인프라로 한국인들에게는 생명줄과도 같다.


첨단기술이 빚어낸 ‘인공 섬’ 종합해양과학기지
섬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항해한 배들과 바닷새가 고단한 생활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식처다. 또 근처에 육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어도가 바로 그런 곳이며 사람들의 희망을 모아 세운 것이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다.

이어도 과학기지는 드넓은 ‘우리 바다’의 한 가운데 솟아 있는 인공구조물(연면적 1320㎡, 높이 76m, 무게 3400t)이다. 이어도 정상으로부터 남쪽으로 700m 떨어진 수심 41m 지점에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해양과학기지다.


이어도 기지는 1995년 착공해 순수 우리 기술로 8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완공됐다. 총 사업비 212억원, 7000여 명의 기술자들이 투입돼 2003년 6월 11일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도는 자동무인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해양과학기지가 세워지면서 신화와 첨단과학이 만나는 현실의 섬이 됐다. 이어도가 21세기 해양강국으로 가는 전초기지로 새롭게 탈바꿈한 것이다.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는 파도, 조석, 해류 등의 바닷물의 움직임을 비롯해 수온, 염분, 대기의 변화, 이산화탄소 등을 365일 자동으로

측정해 관측 자료를 무궁화위성을 통해 실시간 전송한다. 망망대해에 이어도 해양기지를 세우는 것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먼저 중국이 딴지를 걸어왔다. 이어도 해양기지 설치계획이 알려지면서 중국 정부가 해양기지를 문제 삼는 항의서를 보내왔다. 해양기지 프로젝트팀(기지 총괄연구 책임자 심재설 박사)은 국제법상 관례를 따르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밀어부쳤다. 당시 프로젝트팀은 이어도 해역이 우리 측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우리 배타적경제수역(EEZ)이나 대륙붕으로 간주될 수 있어 이어도 기지를 세우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어도 관련 한중일 방공식별구역. 

이어도 수중 표지석.

해상 공사는 파도 높이가 1.5m 이하에서 진행되지만 이어도의 평균 파도는 3~4m였다. 2002년 10월 구조물을 설치하는 과정에 폭풍을 만났다. 구조물 운반선인 바지선이 폭풍에 휩쓸려 떠내려 갔다. 폭풍의 기세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고, 바지선 선장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폭풍이 물러가고 5일이 자났을 때 구조선이 바지선을 끌고 돌아왔다. 당시 바지선을 상하이 해상까지 떠내려 갔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것이다. 또 100년 만에 기상 이변인 4월 태풍으로 작업중 철수하는 고충을 겪기도 했다

과학자들의 열정과 의지가 이어도를 살려냈다

이건희가 지으려한 "이어도기지", 멍청한 YS는?
이청준 소설 무대였던 전설 속의 섬 이어도가 우리 것이 된 결정적 계기는?


중국이 이어도 상공을 포함한 지역을 방공식별구역(CADIZ)로 발표하면서
갑자기 이어도과학기지가 국제적인 관심지역으로 떠올랐다.

중국 발표 이후 대한민국은 일방적인 방공식별구역에 반발해
새로운 방공식별구역(KADIZ)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그동안 포함되지 않았던 이어도 상공이 추가로 들어갔다.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가 세워지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이어도 상공을 대한민국 방공식별구역으로 포함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400평도 안되는 조그만 과학기지로만 알려졌던 이어도가
갑자기 전국민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어도과학기지는 과학자들의 집념과 노력과 열정의 산물로 태어났다.

이 기지를 태어나게 한 인물은,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 초대 과기처장관을 지낸
김시중 박사(81·과학기술포럼 이사장)이다.

과학기술계의 원로학자로 또 열정적인 과학기술행정가로
오랫동안 활약해온 김시중 박사는
아직도 펄펄 끓는 열정과 건강으로 인터뷰 내내 건재를 과시했다.

김시중 장관은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삼성 비용으로 지을 뻔 하다가,
이건희 회장과 YS사이가 틀어지면서
10년 뒤 노무현 대통령 때 국가예산으로 완성됐다”고
말했다.

김시중 장관이 이어도과학기지 건설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93년 4월 중순 해양연구소 초도 순시하면서
업무보고를 받았을 때였다.

당시 이동영 책임연구원은
“1986년에 해양연구소가
KBS와 함께 이어도 주변 생태계를 조사했는데,
완벽하게 조사가 안돼서
추가로 조사하도록 지원했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그러면서 “기상관측 과학기지라도 세워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요구했다.

이때 김시중 장관은 미국 유학시절을 떠올렸다.
학회 참석차 뉴욕 옆 대서양 연안을 갔는데
사 람들이 바다에 폴대를 세워놓고 다이빙을 하면서 즐기는 모습을 보았다.

기상관측기구로만 좁게 생각할 게 아니라
더 연구해야겠다면서 조사를 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이 파랑도로 이름붙이고 해군기지를 만들려던 사실]도 알아냈다.

이어도 대신
일본의 나까소네 수상은
동경에서 2,400km 떨어진 수면높이 70cm 되는 오키노도리시마 섬에
반경 25m 높이 3m 인공섬을 300억엔 들여 만들었다.

이 섬을 기점으로 배타적 경제수역(EEZ)를 긋다보니
43만㎢(일본 영토의 1.15배)의 바다가 추가로 편입됐다.

과학기지를 만들어야 ? 渼募?생각을 굳힌 김시중 장관은
국제 분쟁을 우려해서 유엔해양심판관인 고대 박춘호교수에게 전화걸어
“국제해양법에 걸리지 않는지 외국인 전문가하고 논의해달라”고 부탁했다.

보름 뒤 박교수가
“유엔은 암초위에 등대구조물 세우는 것을 기대하고 권장한다”고
답변을 해옴에 따라,
구체적인 계획수립이 시작됐다.

다시 외무부-내무부-국방부 등 8개부처에
해양과학기지의 활용도가 있느냐 물어봤더니
모두 다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국가사업으로 해아겠다는 생각을 굳힌 김시중 장관은
정재석 부총리(1993~1994)에게 찾아갔다.
신이 나서 설명하고 나서 예산을 달라는 김시중 장관을 물끄러미 처다보던
정 부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기술이나 열심히 하세요.
돈도 없고
국토넓히려는 생각하지 말고.”


순수한 과학자였던 김시중 장관은,
그때 처음으로 “아, 우리나라 국토가 넓어지는구나”고 생각했단다.

그래도 김시중 장관은,
해양연구소에 계획수립을 지시했다.
흥분한 연구원들이,
360평-550평 규모의 2가지 안에 건설비 126억원짜리 계획서를 들고 왔다.

이 안을 들고 다시 정 부총리를 찾아갔으나,
역시 예산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김시중 장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고려대학교 체육위원장 자격으로 괌전지훈련가서 보았던
잠수함여행코스가 생각이 났다.
그게 관광객을 끌어들였던 점에 착안한 것이다.

그 얘기를 던지니 정 부총리는 마지못해 ,
"그러면 관광회사에 얘기해서,
관광지코스를 개발하고 20년 기부체납하라"는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이어도까지 가려면 헬기로 제주에서 40분을 걸리므로
헬기사업하는 관광회사 관계자를 불러
“잠수함 관광기지 만들고 기부체납하시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지만,
보름 뒤에 거절당했다.

그래도 꼭 필요한 시설이라는 생각에,
김시중 장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화가 나서 다시 삼성관광 불러 똑 같은 이야기했더니
20일 뒤에 역시 못하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이렇게 무산되나 싶었다.

그런데 94년 9월,
삼성중공업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삼성중공업이 맡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분위기를 바꾼 것은 이건희 회장이었다.
그 해 여름 이건희 회장이 독일갔다 와서 업무보고 받는데
삼성관광이 그 업무보고 하니까,
이건희 회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게 왜 개인일이냐?
삼성관광 가지고 안되니
삼성중공업 사장 가서 추진시켜라”


흥분과 열정으로 똘똘뭉친 해양연구소 연구원들은
밤잠을 설치면서 한 번도 안 해본 해양과학기지 설계에 매달렸다.

당시 이 일의 실무를 맡았던
심재설(沈載卨) 박사(56 ·해양과학기술원 특성화연구본부장/연안재해재난연구센터장 )는
이렇게 말했다.


"삼성중공업 사람들과 수없이 만나
협력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했어요.
삼성이 세워주고, 기
지에 삼성로고를 붙이는 데까지 논의가 진척됐죠.

양해각서 내용도 조율을 마치고,
이제 한 번만 더 만나고 나서,
연구원장과 삼성중공업 사장 사이에 사인하는 일만
남은 상태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삼성과 청와대가 강력한 난기류에 빠져들어갔다.
당시 삼성과 YS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진 원인을
이건희 삼성회장의 베이징 발언으로 보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베이징에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4류, 경제는 2류"라는 취지로
국내정치를 비판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청와대에서 중단 지시가 내려왔다.
이건희가 지을 뻔 하던 이어도 과학기지는
결국 10년 뒤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 임기때 완공됐다.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 생각홰보면,
당시 이건희 회장의 발언은 하나도 틀린게 없어 보인다.
이어도 해양기지를 삼성중공업으로 하여금 짓도록 하겠다는
이건희 회장의 판단 역시 YS보다 한 수 위였던게 틀림 없다.

머리에 든게 별로 없는 YS로서는
이어도 해양과학기지가 뭔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YS가,
당시 이어도 해양과학기지건에 관심을 갖고 본인이 앞장 섰더라면,
IMF를 초래한 대통령이란 [불명예]와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구축이란 [명예]가
그에 대한 평가에 균형을 맞춰 주었을 것이다.

김시중 장관은 94년 12월말에 퇴임했지만
이어도 과학기지만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김시중 장관은 기회있을 때 마다
역대 과기처장관에게 이어도해양기지 계획을 양성화해야 한다며
계속 건의했다.

YS에 이어 집권한 DJ 역시 혜안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
DJ정권 내내 이어도 프로젝트는 지지부진.

그러는 사이 96년에 해양수산부가 생겼다.
그러자 해양연구소를 과기처에서 해양수산부로 이관하는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이어도 프로젝트는 또 늦어졌다.


“참 답답하고 분통이 터질 일이죠.
나는 이것을 꼭 해야겠다 싶었어요.
계속 연구해보니 꼭 가져야 할 귀중한 섬이에요.
어자원도 많고 지하자원도 풍부하고,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이러다간 진짜 안되겠다 싶었는데,
마침 해수부 장관으로 김호식 장관이 임명됐어요.
이 분이 나처럼 논산출신이어서 잘 알아요.
나는 그때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회장이라
과총회장 직책으로 장관 면담을 신청했어요.

후배 장관실 찾아가는게 쉽지 않은 거에요.
밖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을 아니다 하면서 기획관리실장 동석시켰어요.
이거 안되면 과학기술계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때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잖아요.
노무현 대통령은 해수부 장관도 지냈겠다,
해수부에서 청와대에 이야기하면서 빠르게 진척돼
2003년에 마무리 된 거지요.“


김시중 장관은 이어도에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해양연구소에서 준공식 버튼을 누르는 영광을 가졌다.

 

 

 

김시중 장관은
자기 스스로 이때를 생각하면서 “영광을 가졌지”라고 표현했다.
1994년부터 시작한 일이 온갖 장애와 반대를 뚫고 10년만에 결실을 이뤘으니
이는 분명히 “영광”이라고 표현할 만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별 일 없었으면
이어도과학기지는 1995년에 완성됐을 거에요.
내가 입다물고 있으면 그냥 넘어갔을지 몰라요.
하지만 옳다고 생각해서
장관에서 물러난 뒤에도 끝까지 밀어부쳤지.”


당시 실무를 맡아 진행한 심재설 박사는,
이어도기지 건설의 세부 내용을 꿰뚫고 있다.
이어도의 영어 이름은 <소코트라 바위>(Socotra Rock)이다.
영국 상선 <소코트라>가 이 바위에 부딛혀 배바닥이 약간 손상되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한때는 <파랑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바닷물이 이 암초에 부딪히면서 강한 파도가 치기때문에
파도를 일으키는 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어도라는 이름은 제주도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이어져 내려왔다.
이청준 소설 <이어도>를 통해서 더 유명해졌다.
심재설박사가 2003년에 과학기지 이름을 지을 때 조사를 해보니
6대4의 비율로 <파랑도> 라는 이름보다 <이어도>를 더 꼽았다.

우리나라 태풍의 40~50%는 이곳을 지나온다.
이어도에 기상관측 장비를 설치해서 태풍의 성격을 파악하면,
대책을 세울 수 있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학기지는 이어도 섬에서 조금 떨어진 평탄한 곳에 세워야 좋다.
이어도에 의해 물결이 바뀌기 때문에 이어도 바위를 피해 세우는게 좋다.

 

하지만,
이어도 바위에서 벗어난 곳에 세우면 이어도 기지라고 할 수 있느냐는
정서적인 괴리감이 생긴다.
이 같은 사항을 고려해서 이어도 봉우리에서 700m 떨어진 남쪽
이어도 경계안에 과학기지의 위치를 잡았다.


“기지건설에 들어간 비용은 212억원입니다.
그렇지만 최근 이곳에 쏟아지는 국민적인 관심을 보면
실제 가치는 건설비에다가 동그라미 서너개를 더 붙이고 싶어요.
선견지명이 빛을 크게 빛을 발했죠.
이어도 과학기지가
지금처럼 매스컴을 많이 탈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아마 지금 그곳에 기지를 세우려면 절대 못했겠죠.”


-심재설박사


이어도 과학기지의 전체무게는 3,000t정도이다.
공사는 현대중공업이 맡아서 했다.

 

이보다 수십배 되는 해양구조물을 설치한 경험을 가진 현대중공업에게
3,000t짜리는 성냥갑에 불과한 아주 작은 규모였다.
그러나 2002년 하부구조물을 설치할 땐 예상보다 2배 시간이 들어갔다.
파도가 잔잔한 9~10월을 공사시기로 잡았지만,
유난히 그해에만 파도가 많이 쳐서
공사에 동원된 바지선 8척 중 한 척이,
상해 앞바다까지 떠내려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상부구조물은 2003년 5월에 설치했다.
5월도 태풍이 거의 없는 시기이지만,
이때도 예상치 않은 강풍이 불면서 제주도로 피항하는 일이 생겼다.

이어도는 바닷속 암초이므로 지반이 매우 단단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달랐다.
마치 초코파이처럼 겉은 약간 단단하지만, 그 아래는 물렁했다.
네덜란드 지반조사 전용선을 동원해서 암반조사를 해보니 1.5m만 암반인데
그나마 콘크리트의 4분의 1 강도에 불과한 응회암이었고
그 아래로는 모래와 뻘을 이뤘다.

다리를 4개만 세우려다가 추가로 4개를 보강해 8개로 늘렸다.
4억원 정도 되는 암반조사를 생략하고
처음 설계대로 4개만 세웠으면 큰 낭패를 볼 뻔 했다.

바닷물 구조물을 세우다 보니 3중으로 부식방지 장치를 만든다.
첫번째로 부식장지 페인트를 두껍게 바르고
두번째로 전기도금으로 알루미늄 합금을 부착하고
세번째는 12㎜의 부식을 허용하는 것이다.
12㎜ 이상은 잘 부식되지 않으므로 아예 부식허용치를 만들어놓았다.

구조물 다리의 파이프 직경은 1.6m나 된다.
제일 두꺼운 곳은 45㎜이다.

심재설박사는 41살에 이 사업을 시작해서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맡아했다.
이어도과학기지를 하면서,
심재설박사는 한번은 죽을 고비를 넘겼? ?

2001년에 울산 현대중공업 기술진하고 회의를 마치고 저녁먹으러 가는데
배가 너무나 아파서 견딜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급히 안산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병원에 갔더니 포카리스웨트를 먹으면 가라앉을 것라는 처방을 받았으나
4일 동안 통증은 가라앉지를 않았다.

다시 고대병원을 갔더니 맹장이 터졌다는 진단이 나왔다.
맹장이 터진 줄 모르고 4일을 견뎠으니 온 몸은 완전히 감염된 상태.
급히 수술을 하고는
무려 4시간동안 거의 걸레빨듯 내장을 청소해야 했다.

또 한번의 시련은 공사를 마친 뒤 닥쳤다.
2003년 6월 완공하고 잘 가동하는 중이었는데,
3개월뒤인 9월에 태풍 매미가 우리나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내일모레면 매미가 한반도에 상륙하는데
그동안 잘 가동되던 과학기지에서는 기상관측자료가 오질 않았다.

해경에 헬기를 요청했으나 초속 15m가 넘어 거절당하고
하는 수 없이 10t짜리 배를 빌려 운영위원 4명을 보냈다.

제주도에서 7시간이면 도착하는 이어도인데
아무리 기다려도 운영위원들이 도착했다는 신호가 오질 않았다.

태풍은 이어도과학기지 500km앞까지 닥친 상황이었다.
일요일, 연구소에서 대원들의 연락을 기다리던 심재설 박사는 초주검이 됐다.
보내지 말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이때처럼 실감나던 때는 없었다.

10시간 만에 연락이 왔다.
과학기지가 가동을 멈춘 것은,
전원공급이 끊겨 시스템이 다운됐기 때문이었다.
배가 파도를 거스르며 가는 바람에 시간이 늦은 데다,
과학기지의 전원이 끊기면서 자동 사다리가 내려오지 않아
대원들은 해적처럼 밧줄을 던져 걸어야 했다.
서툰 솜씨로 수십번에 걸쳐 밧줄을 던져 간신히 올라가서 발전기를 돌렸다.

알고 보니 아주 간단한 운영착오였다.
전원공? 事梁〈?발전기-풍력발전기-태양발전기 3종류가 설치됐지만,
3개월이 지나면 발전기를 다시 돌려야 하는 반자동시스템이었다.
연구소에서 원격으로 발전기를 돌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심재설 박사는 절대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이어도과학기지의 수명은 최소한 50년으로 보고 있다.
심재설 박사는,
한국 중국 일본 미국 과학자들과 공동연구를 추진해볼 만 하다는 의견을 낸다.
4개국 과학자들이
이어도기지에서 나온 자료를 분석하고 관측하는 공동연구로 유대감을 형성해보자는 것이다.

[사진출처=한국해양과학기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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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설 기고] 해양과학기지 10주년을 회상하며

이어도 기지,


지금 건설하려 했다면 가능했을까?

이어도... 전설로 남고 싶어하다

이어도 과학기지

건설을 회상하며


-심재설 박사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이
KISTI 부설 해양연구소로 창립된지 40주년이 되는 지금,
그 40년 동안 우리 해양과학기술원을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던 큰 발자취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생각나는 것을 꼽을라 치면
2003년에 완공된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는 반드시 포함될 것이다.

이어도 기지는,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해양과학기지일 뿐만 아니라
매년 여러 개의 태풍이 지나는 매우 열악한 곳에 있지만
그만큼 관측 중요성이 높은 해역에 위치한,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 없는 해양과학기지이다.

또한 이어도 기지는
국내 해양구조물의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Offshore 구조물 및 공사]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올해는 우리 해양과기원 창립 40주년일 뿐만 아니라
이어도 기지가 완공된지 1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쉼없이 몰아치는 거센 바람과 격랑을 견디며 늠름하게 버티고 서 있는
이어도 기지를 보고 있노라면
기지 건설 당시의 숱한 역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1984년과 1986년, 당시 한국해양연구원은
제주 KBS, 그리고 제주대학교와 공동으로
전설 속의 이어도를 과학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현재의 이어도 해역을 탐사하였다.

탐사 결과 확보된 과학적 근거들을 바탕으로
수심 4.6m 아래에 있는 수중암초가 [전설 속의 이어도]라고 잠정 결론지었다.

 

이후 해양수산부는
이어도로 인한 해양사고를 방지하고,
이 해역에 대한 해양관측을 목적으로 부이를 설치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이들은 태풍 등으로 인해 오랜 기간 관측을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이 해역의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안정적인 관측수행이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당시 연안방재연구사업단 이동영 박사가,
해양관측탑을 건설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이후 대형 해양구조물로서 해양과학기지를 건설하는 것으로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후 1997년에는 해양관측부이를 설치하여 기지를 설계하기 위한 환경조건을 조사하 였고,
이듬해인 1998년에는 해저지반조사도 수행되었다.

 

해저지반조사 결과,
이어도 해역의 해저 지반은 단단한 암반이 아니라
표층 몇 미터 정도만 단단한 응회암으로 되어 있었을 뿐,
그 아래는 모래와 점토로만 되어 있었다.
마치 겉만 단단하고 속은 말랑말랑한 초코파이 같았다.

지반조건이 예상보다 약했기 때문에,
Skirt Pile 공법이 제안되었다.
이는 기존 4개의 파일 외에 추가로 4개의 파일이 추가되는 공법이다.
2000년 7월에는 설계된 구조물에 대한 축소모형 실험이
한국해양연구원 대덕분원 수조에서
실제 크기의 1/80로 제작된 모형을 가지고 수행되었고,
2001년 5월에는 현대건설 기술연구소에서 이어도 기지에 대한 풍동실험도 실시하였다.

이는 해양구조물에 대한 최초의 풍동실험이었다.
이로써 해양의 악조건과 거센 비바람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해양구조물임을 검증하였다.

이렇듯 한창 이어도 기지에 대한 설계와 제작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중국 외교부로부터
이어도 기지 건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항의서한이 접수되었다.

당시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연구원, 그리고 외교부는 이에 대해
국제법상 관례에 따라 배타적 경제수역을 따졌을 때
이어도 해역은 우리측 영역에 포함됨을 근거로 하여
이어도 기지 제작을 계속 수행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어느덧 12년 전의 일이 되었다.
현재의 중국이라면 과연 이어도 기지 공사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본다면,
매우 적절한 시기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2001년 8월부터 2002년 9월까지 약 1년 여 동안,
울산의 현대중공업은 이어도 기지의 데크 부분을,
목포 현대삼호중공업에서는 쟈켓 부분을 제작하였다.

2002년 9월 30일,
드디어 이어도 기지 하부 구조물인 쟈켓이 먼저
목포에서 이어도 해역으로 출발하였다.

쟈켓은 10월 2일,
이어도 기지 설치 현장에 도착하여 잔잔한 해상 상태에서
GPS 시스템을 이용하여 정위치에 쟈켓 구조물을 내려 놓았 다.

이어도 기지의 쟈켓 방향 오차는 1° 이내로 맞춰져
계획된 오차 범위내에 설치되었고,
수평 설계 오차범위도 맞추어
쟈켓을 정위치시켰다.

 

 

 

그러나 쟈켓 설치가 한창 진행되던 중,
예상치 못한 10월의 폭풍이 이어도 기지 설치 현장을 덮쳤다.
일주일 이상 3m 이상의 파도가 몰아쳤고,
강풍은 초속 40 m 이상까지 불어댔다.

그러던 중 바지선 한 대의 앵커라인이 모두 끊어져 버렸다.
동력이 없는 바지선이
선장을 태우고 해류를 따라 남쪽으로 흘러가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후 예인선이
상하이 인근 해상까지 흘러간 바지선을 찾아 되돌아오긴 하였으나
아찔한 상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쟈켓 설치는 마무리되었다.

당초 설치에 보름을 예상하였지만,
? 프?소요된 시간은 거의 한 달에 이르렀다.
이미 10월말에 이르러
북쪽에서는 차갑고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002년에 상부구조물까지 올려 기지를 완공하려던 계획은
바다가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해로 넘기기로 했다.

2003년 4월,
이어도 기지의 상부인 데크가 울산항에서 이어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데크 설치 작업은
이어도 기지 설치 작업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작업이었다.

부디 바다가 공사에 협조해주기만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데크를 실은 바지선이 이어도 해역에 도착할 즈음,
다시 시련이 닥쳤다.
태풍 <구지라>가 발생하여 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4월에 태풍이 발생하여 북상하는 건
1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어도 기지 설치팀은 정말 이어도를 지키는 용왕이 있어,
인간이 이어도를 손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인간이 획득한 과학의 힘으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자연의 위력 앞에 경외감이 들었다.
이런 경외감이 옛날 우리 선조들에게는 신앙이 되었을 것이리라.
어쩔 수 없이 설치팀은,
다시 제주 한림항으로 피항하였다.
해양구조물 공사는 하늘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 같았다.

일주일 후 데크를 실은 바지선이 다시 이어도 해상으로 향했다.
현장에 도착하자 혹독한 겨울바다를 견디고 선 쟈켓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해상상태는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이었다.

크레인선의 대형 크레인이 데크를 들어올렸다.
그 순간 거짓말처 럼 다시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우리 공사를 방해하는 신적인 존재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쟈켓의 레그 부분에 데크를 결합하면 가장 큰 공정이 마무리되는 것이었지만,
바다가 일렁거리면서
크레인 기사가 도저히 작업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8시간 동안의 노력 끝에
드디어 쟈켓 위에 데크를 결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작업선들 위, 여기 저기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무뚝뚝해서 감정 표현에 무척 인색한 뱃사람들에게도
감동적인 장면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동안의 목숨을 건 힘들고 위험한 공사과정이 없었더라면,
이런 감동은 없었을 것이다.

2003년 6월,
이어도 기지에 대한 첫 점검이 이루어졌다.
통신-관측-전기 등 각종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는지,
연구원 및 운영요원들의 생활에는 지장이 없는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어도 기지에 대한 많은 언론사들의 취재와 언론보도가 이어졌다.
이어도 기지가 태풍을 사전에 관측하여
태풍피해를 줄이는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는 내용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때를 맞추어 태풍 <매미>가 북상하였다.
이어도 기지의 성능을 시험해볼 절호의 기회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어도와 관련된 시련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풍 <매미>가 북상하고 있는 와중에 이어도 기지의 시스템 작동 이 중단되었다.
그 동안 언론을 통해 태풍을 감시하는 첨병이라고 국민들게 소개했던 내용이
모두 거짓말이 될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기지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태풍 <매미>가 접근하면서 악화된 기상은
해양경찰의 헬기 지원을 불가능하여
차선책으로 선박을 빌려 이어도 기지로 들어가기로 했다.
어렵게 어선의 선주님을 설득해 출항할 수 있었다.
태풍 <매미>가 북상하기 불과 이틀 전의 일이였다.

운영요원들을 태운 10톤 정도의 선박은 통신장비 미비로
이어도 기지에 도착해서 시스템을 정상화시킨 후,
기지 통신시스템을 통해 상황을 전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해양연구원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어도 기지 운영센터에서는
운영요원들이 기지에 도착했다는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높은 파도를 감안해서 넉넉하게 예상한 도착예정 시간을 3시간이나 넘겨도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질 않았다.
일일여삼추라는 말이 이와 같은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다.

최악의 상황들이 자꾸 머릿 속에 떠올랐고,
운영요원들의 목숨을 담보로 무리한 결정이었던 것 같아
해양연구원 기지운영센터에서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어도 기지에서 오는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전화벨이 울리고 운영요원들의 반가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또렷이 전해졌다.
반가운 마음에 가슴이 벅차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전화통화를 하기 힘들 정도로 목이 메었다.
하고 싶은 말은 하나 뿐이었다.


“고생했다.
파도가 높으니 안전하게 나오라.”


이어도로 출발하기 전,
담아 두었던 기지시스템의 고장에 대한 원망과 질책의 마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의 무사함에 마냥 감사할 따름이었다.

운영요원들의 용기와 책임감, 그리고 희생정신에 힘입어
이어도 기지는 우리나라에 내습한 최대의 태풍 <매미>를 사전에 관측할 수 있었고,
각종 언론매체들을 통해
이어도 기지에서 관측되는 생생한 태풍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어도 기지가 건설되자마자 그 가치를 발하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 당시를 회상하면,
천국과 지옥을 며칠 사이에 번갈아 경험했다는 표현으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10년 동안 이어도 기지는
태풍의 길목에서 한반도를 지키는 첨병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
2007년부터는 이어도 기지의 운영권이 국립해양조사원으로 인계되었다.

 

1997년부터 이어도 기지를 계획-설계-제작, 그리고 설치에 이르기까지
고민하고 공 들였던 세월이 영화 필름처럼 떠올랐다.
남의 집에 딸을 시집 보내는 아비의 마음이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잘 관리하고 운영해 주십사 하였고,
혹시나 우리 연구팀이 미처 배려하지 못한 건 없는지 마음이 쓰였다.

앞으로도 이어도 기지는 적어도 40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것이다.
만약 이어도 기지가 그 수명을 다하고 바다 속으로 잠들어갈 때,
그 자리는 누가 또 대한민국의 해양임을 알도록 지키고 서 있게 될 것인가?
그게 가능하기는 할 ? 痼寬?

요즘 들어 해양으로 힘을 확장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을 보았을 때,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은 오늘이다.
이어도 기지는 우리 세대가 후대에 남기는 자산이자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하는 숙제라 생각한다.

50년 후에도 우리나라를 지키는 해양의 첨병으로 이어도 기지가 굳건하게 서 있길 바라며,
이어도 기지를 통해 우리나라의 해양력이 더욱 견고해져 있길 기원해 본다.


[사진출처=한국해양과학기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