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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록/국내여행 종합

원효대사 탱화모음

by 윤라파엘 2011. 5. 31.

5월 22일(2011년) 에 가족들과 표충사엘 들렀더니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의  모습을 담은

전국사찰의 탱화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 24 편의 탱화사진 -  

 

 

 

 

 

 

 

 

 

 

 

 

 

 

 

 

 

 

 

 

 

 

 

사진에서 느껴진 공통점은 머리가  말갛고 , 수염이 있고 , 조금 못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는 누구인가??

<인터넷 백과사전을 찾아 보았다>

 

그는 신라 617(진평왕 39)~686(신문왕 6)년에 70세에 세상을 떠난 승려이다.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지 90년 만에 태어난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불교사상가이자 사회지도자였다. 그는 해박하고 심오한 불교 학해(學解)로 방대한 분량의 불교 관계 저술을 남겼다. 속성은 설(薛). 아명은 서당(誓幢)·신당(新幢).

출가한 뒤 스스로 첫새벽[始旦]을 뜻하는 원효라고 이름지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어머니가 그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낳을 때에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아명인 서당의 당은 속어로 '털'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서당은 '새털'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하고 달이 찼을 때 집 근처의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어 다급한 중에 남편의 털옷을 그 밤나무에 걸고 그 밑에 자리를 마련하여 아기를 낳은 데서 얻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송고승전 宋高僧傳〉에 의하면 14~15세 때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으며 남달리 영특하여 나중에 불법의 깊은 뜻을 깨달음에 있어서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시에 의하면 원효는 의상(義湘)과 함께 고구려 고승으로서 백제 땅 전주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간 보덕(普德)에게 〈열반경〉·〈유마경〉 등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 낭지내운(朗智來雲)에 의하면 원효가 반고사(磻高寺)에 있을 때 영취산 혁목암(赫木庵)의 낭지가 그로 하여금 〈초장관문 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 安身事心論〉을 쓰게 했는데, 원효는 그 글을 지어 낭지에게 전달하면서 글 끝에 "서쪽 골 사미는 엎드려 동쪽산의 상덕 고암 앞에 절합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는 원효가 낭지에게 사사했거나 단순히 학덕 높은 노화상으로 존경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유사〉 석혜공전(釋惠空傳)에는 당대의 신승(神僧) 혜공(惠空)이 만년에 항사사(恒沙寺)에 있을 때 원효가 여러 경전의 소를 찬술하면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는 언제나 혜공에게 가서 질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원효는 650년(진덕여왕 4) 의상과 함께 당나라 현장(玄奘 : 602~664)에게 유식학(唯識學)을 배우려고 요동에까지 갔다가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돌아왔다. 661년(문무왕 1)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바닷길로 당나라에 가기 위해 당항성(黨項城)으로 가는 도중 비 오는 밤길인지라 어느 땅막[土龕]에서 자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깨어보니 땅막이 아닌 오래된 무덤임을 알았다. 비가 계속 내려 하룻밤을 더 지내다가 귀신의 동티를 만나 심법(心法)을 크게 깨치고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원효는 모든 진리를 체득하게 된 것이었다. 이때가 34세이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
심멸즉촉루불이(心滅卽觸루不二)

마음이 일어나면 각각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해골과 바가지가 둘이 아니다.

또한 그는 "또 무엇을 구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하여 더이상 입당 유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곧바로 되돌아와 이후 저술과 대중교화에 몰두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불교와 일반 서민불교 사이에는 여전히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 혜공·혜숙(惠宿)·대안(大安) 등이 일반 서민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그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생활화시켰다.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지방의 촌락, 길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무애호(無碍瓠)를 두드리고 〈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가 이처럼 서민의 교화에 나선 것은 학문적인 구법(求法)을 위한 입당을 포기한 후 심법을 깨달은 뒤이며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실계(失戒)로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자칭하던 때 이후로 보여진다. 그는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후일 대학자가 된 설총(薛聰)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또 그가 스스로 소성거사라 부른 것은 실계로 인한 속죄의 한 방법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대중교화의 선구자인 혜공이 등에 삼태기를 지고 길거리에서 대취하여 노래하고 춤추었던 것이나 대안이 특이한 옷차림으로 장판에서 동발(銅鉢)을 치면서 "대안 대안"을 외친 것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대중교화의 행적을 마친 뒤에는 다시 소성거사 아닌 원효화상으로 돌아가 혈사(穴寺)에서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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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사진의 전시장 게시상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동상의 원효대사

 

원효대사의 흔적은 의성 빙계에도 요석공주와의 일화를 간직하고 있고 , 방울스님 이야기도 있다.

 

원효대사와 방울대사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파계를 하고

뒤움박을 차고 돌아다니다가

甘泉寺(감천사)에 이르러

석 달간 공양주 노릇을 했다


스님중 공양주는 제일 하찮은 직책이라서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고 공양주는 평생 공양주 노릇밖에 못하는

빈천한 것이었다.


그런데 방울 스님은 항상 찾아와 인사를 올리고

누룽지를 얻어가는 것이었다


절에 있는 수백 대중은 원효가 지은'화엄경소'와

'대승 기신론'을 공부하면서

도 자기들에게 밥을 해 준

사람이 원효대사인줄을몰랐다.


그런데 하루는

방울대사가 누룽지를 얻으러

내려오지 않자 원효가

방울스님의 처소에 찾아가자


방울대사는

"화엄강백이 아닌가?"하였다


이 말은 화엄경을 설하는

큰 스님이 아니냐라는 말이다


원효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고 되묻자


방울스님은

"자네 원효스님이 아닌가?"하고 말하였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방울은

당신이 수백 대중의 눈을 가리운다는 것은

대단한 힘이지 그러나 원효스님은

도력이 부족하여서 내 눈을

가리울 힘이 없는 게지,


스님은 아직 신상의 눈은 못

가려 내가 부질없는 말을 했구만.


"원효는

"귀신의 눈에 안뜨이는 법이 있습니까?"


방울은

"마음이 텅 비이면.


"원효는

"어떻게 비입니까?"


방울은

"모든 오욕을 털어 버리고 나라는 것도 없이하고

어디에 걸림이 없으면 물에 들어

가도 빠지지 않고 불에 들어

가도 타지 않으며 얻으려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구해지는 이치가 있어서 어떤

귀신도 당신을 감히 찾아내

지 못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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