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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s 공간/삶의 지혜

300년 안동 회화나무 이야기

by 윤라파엘 2010. 8. 4.

옛 임청각(臨淸閣) 앞마당에 있었던 나무

( 임청각과 회화나무가 서있던 그 사이로 중앙선 철길이 지나고 있다 )  

 

30여년 전 부터 처가인 안동을 드나들며 , 보았던 안동댐 올라가는 입구 도로중앙에 버티고 서있던 그 회화나무가

이제 종적을 감추었다는 뉴스를 접한다. 법흥교에서 시내진입을 하기위해 신호를 기다리다 보면 늘 눈에 들어욌던 그 나무가,

최근에 밑둥을 드러낸체 짤려나가고 , 금줄을 쳐놓아 의아했는데 ,기사를 보고 전말을 알게 되었다. 

 

더우기, 중앙선 철길이 그 일대의 유적지에 근접해 지나고 있어서 안타까운 생각을 했는데 , 일제의 만행이라고 한다.

그 유적지들 중 7층전탑은 철길과 딱 붙어있어 놀랬던 기억이 있다.  안동역이 이전되면 철도가 걷히고, 유적지도

복원되기를 바래본다. 그런데 죽은 회화나무는 어떻게 살리나???

 

사진과 기사를 옮겨본다.

 

 오른쪽의 가림막이 철도다.  철길이 없다면 앞의 강과 더불어 수려한 풍광일텐데,,

 

 

좌측의 철도가림막,, 전체모양으로 사진 찍을공간도 부족했으니,, 

 

 

 

 

 

 

(사진촬영 2009.1.1 ) 

 

망국의 한 담은 300년생 나무, 한순간 교통사고로 끝내...
헤럴드경제

 

경술국치 망국의 한을 간직한 안동댐 입구 회화나무가 지난 3일 새벽에 발생한 교통사고로 결국 뿌리째 뽑히는 불운을 겪으면서

나무의 기구한 운명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나이 약 300년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고성 이씨 종택인 임청각(臨淸閣) 99칸 대저택의 대문 앞에 자리잡고 있었다. 

임청각은 경술국치를 맞아 망국의 한을 품고 가족과 더불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년.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산실로 불리고 있다. 

이 나무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공식적으로 빼앗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을 전후해 일본군 수비대가 인근에 주둔하면서부터

우리 역사의 아픔을 함께 해 왔다.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1월 어느날 임청각 주인인 석주 선생이 식솔을 이끌고 만주를 향해 출발하던 모습도 이 나무는 꿋꿋이 서서 지켜봐야 했다. 

석주 선생은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에 친인척 등 50여 가구에 달하는 많은 식솔을 이끌고 비장한 각오로 망명길에 올랐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나라 잃은 명문대갓집의 아픈 역사를 지켜 본 이 나무 또한 비운의 굴레를 벗지 못했다. 

지난 1930년대 말 중앙선 철도 부설 과정에서 일제가 의도적으로 독립운동가 집안의 종택 마당 한가운데로 철길을 놓으면서 졸지에 대저택과 분리되고 말았다. 

그 30여년 뒤인 1970년대 초에는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댐 진입로 한 가운데 고립되는 운명에 처하면서 온갖 풍상을 겪어야 했다. 

교통사고가 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신앙적인 이유 등으로 이 나무를 없애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무는 꿋꿋이 자리를 지켰고 지역주민은 신령스러운 나무로 불러 왔다. 

그러던 중 지난 2008년 8월 어느 날 새벽에 전기톱으로 무자비하게 밑동이 잘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결국 죽는 것 아니냐는 안타까움이 이어졌지만 기적적으로 그루터기에서 2세목이 싹을 틔워 역사의 질곡을 견뎌낸 300년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나무의 그루터기마저 뿌리째 뽑혀나가 그 속에서 자라던 2세목마저 생명을 잃었다.지난 100년 우리 역사의 아픔을 지켜 본 나무는 결국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70년 가까이 이 나무를 지켜봤다는 주민 김모(75) 씨는 "나라 빼앗긴 지 100년 되는 해에 이렇게 허무하게 생명을 다하게 돼 안타까운 마음을 이루 표현할 수 없다"며 "일제의 농간이 아니었다면 이런 운명을 맞지 않아도 됐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다"고 말했다.
헤럴드생생뉴스/online@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