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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s 공간/┕ 신앙의 길

전 부산교구장 (故)이갑수 주교

by 윤라파엘 2017. 1. 15.

<가톨릭신문 인용기사입니다>

은퇴 사제의 삶과 신앙] 전 부산교구장 이갑수 주교 (3)

부제수품 후 6개월 만에 사제품
쥐 떨어지던 허술한 범일성당 사제관서 생활

가톨릭 신문 발행일2003-01-01 [제2329호, 20면]

나는 5년제였던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할 무렵 당시 교장이시던 장면박사의 도움으로 둘째 자형이 있는 일본에 다녀올 수 있었다. 장면박사가 동대문경찰서 형사과장을 통해 일본행 비자를 얻어준 덕분에 건너간 일본은 패망직전이라 먹을 것이 부족해 호박죽 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사업을 크게 일으켰던 자형네가 그랬으니까 일반서민들의 삶은 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하나 장면박사의 활약상이 기억난다. 내가 대신학교를 졸업할 무렵 좌?우익 충돌이 심했었는데 성령강림대축일 전날 밤의 일이다. 우리반 신학생이 창문으로 혜화동 교정을 내다보다가 『운동장에 불순분자(빨갱이)가 들어왔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비상 종소리를 울리고 급기야 인근 경찰서에 신고했으나 나중에 허위신고죄로 신학생 전원이 성북경찰서에 붙잡혀 간 적이 있었다. 이때 장면박사가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씨께 부탁해서 신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부제품을 받은지 6개월만에 사제품을 받았다. 이것은 순전히 6?25라는 전쟁 덕분(?)이었다. 6?25직전 부제품을 받은 나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당시 서울대신학교장 정신부의 명령으로 여러 신학생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우리 일행은 서울 시민들이 대부분 피난간 후-아마 6월 27일로 기억된다-잠실 선착장에서 야간에 비를 맞으며 마지막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갔다. 이날 밤 서울교구 이신부님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잠을 자는데 새벽에 『꽝』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한강다리가 폭파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피난 길이 막힐 뻔 했었다.

이튿날 본격적인 피난길에 오른 우리는 김대건신부님 묘소가 있는 미리내까지 걸어갔다. 먹을 것이 없어 길가의 과일을 따먹으며 미리내공소에 도착하자 회장님이 밥을 지어주셨다. 모처럼 만난 밥상앞에서 당시 4품(부제 직전)을 받았던 고 지학순주교가 『성부와 성자와…하고 먹어야지』하면서 부제품을 받은 나보고 성호경을 그어라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주교를 비롯 대구대교구 윤광제 신부, 제주교구 고 김영환 신부, 춘천교구 김방지거 신부 등 우리 일행은 길가의 설익은 수박도 캐먹으며 걷고 또 걸으며 천안까지 갔다. 천안에서 철도청에 근무하던 김방지거 신부 형님의 주선으로 기차로 대구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석탄을 때는 기관차 구석에 옹기종기 웅크리고 앉아 대구에 당도한 것이 혜화동 신학교를 나선지 수개월이 지난 후였다. 대구교구청에 도착하니 많은 신학생들이 먼저 와 있었다. 바로 윗반인 김수환추기경은 『너희들 모두 죽은 줄 알았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1년 후에야 신품을 받게 돼 있었지만 당시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님께서 『피난 온 신부님들께 이것저것 좀 배워서 신품받자』라는 비상조처 덕분에 한창 전쟁중인 1950년 10월28일, 부제품을 받은지 6개월만에 사제품을 받게된 것이다. 대전교구 유봉운 신부, 부산교구 제찬규 신부 등 나와 함께 서품받은 4명은 「6개월 조산아」로 사제가 되었다.

이튿날 고향인 영천성당에서 감격적인 첫미사를 봉헌하고 첫 부임지 부산 범일동본당 보좌로 부임했다. 영천에서 부산으로 갈 때는 당시 범일동본당 주임 정재석 신부님과 동기사제인 영천본당 주임 이명우 신부님이 함께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이 두분 신부님 동기생은 12명으로 당시로서는 사제를 가장 많이 배출한 클라스였다.

내가 사제로서 첫발은 내딛은 범일성당은 파리외방전교회 오신부님이 지은 벽돌식 성당으로 그 당시로서는 아주 큰 성당에 속했다. 그런데 내 방은 허술한 골방이라 밤에는 천장에서 지나가던 쥐가 툭 떨어져 잠을 설쳤던 적이 다반사요, 무척 추웠다.

아무튼 범일동본당 보좌로 일하는 2년 동안 미국에 유학갈 기회가 생겼다. 주일미사 참례차 성당을 찾아온 미국 위스컨신주 밀워키 소재 마케트대학 불어교수인 하인쯔박사를 만나 영어를 배우게 된 것이다. 전쟁 때문에 부산에 와 있는 자기 대학 학생들을 가르치던 하인쯔교수를 통해 영어를 배우던 내 모습이 주임신부님을 통해 아마 교구장에게 보고됐던 것 같다. 어느 날 최덕홍 주교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나를 보고 『미국 유학가거라. 가서 사회학을 전공하라』는 특명(?)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

 ▲ 1950년 10월 28일 사제품을 받은 필자. 왼쪽부터 대전교구 유봉훈 신부, 부산교구 제찬규 신부, 필자. 앉은 이는 당시 대구대교구장 최덕홍 주교.


정리=최홍국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