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디지털사진가협회

[스크랩] 71살 춤 선생, 나의 수호천사가 됐다

by 윤라파엘 2015. 10. 12.
71살 춤 선생, 나의 수호천사가 됐다
http://media.daum.net/v/20151012202806762

출처 :  [미디어다음] 국제일반 
글쓴이 : 오마이뉴스 원글보기
메모 :

71살 춤 선생, 나의 수호천사가 됐다'

일본 쿠사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토야마 하루미씨

오마이뉴스 | 유신준  | 입력 2015.10.12. 20:28
 
[오마이뉴스 유신준 기자]

이토야마 하루미(?山晴美). 그녀는 춤 선생이다. 올해 일흔한 살. 춤추는 사람들이 원래 그런 것인지 그녀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하긴 일본에서 일흔한 살 정도는 젊은 사람 축에 속한다. 이름난 장수국가이기도 하거니와 움직일 수 있는 때까지 일하며 사는 근면한 사람들이라서다. 오죽하면 온 국민이 일벌레라는 별명이 붙었겠는가. 그녀 역시 일하며 산다. 옆 동네 쿠사노에서 '다루마'라는 식당을 경영하는 오카미(女將; 음식점 안주인)다.

 

 


 
▲ 이토야마 하루미
ⓒ 유신준

그녀의 자선공연 때 찍었던 사진을 담은 CD를 전해주러 다루마를 들렀다. 그녀와의 인터뷰는 오래전부터 별러왔던 일이다. 카메라를 꺼냈더니 70년을 살아온 백전노장이 부끄럼을 탄다. 달래고 달래서 겨우 두어 장 건졌다. 분위기를 만드는 건 카메라맨의 필수능력인데 언제나 쉽지 않다. 셔터를 누르고 수습을 나중에 하는 게 내 원칙이다. 일단 저지르고 본다.

그녀는 시코쿠(四國)의 에히메(愛媛)현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곱 남매 중 셋째였다. 바닷가 마을은 어디나 다랑논과 고기잡이를 겸하는 반농반어가 생업이었다. 어릴 적 바닷가의 추억은 평범하고 소박한 풍경이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다지 유복하지 않은 살림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늘 자상했던 엄마다. 아버지는 책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항상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셨다니 일은 뒷전이었을 것이다. 한량 남편 때문에 엄마가 고생을 좀 하셨다던가.

에히메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시즈오카로 나왔다. 풋풋한 청춘이었던 그녀는 같은 회사에 근무하던 남자 이토야마 마스후미씨를 만났다.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스무 살에 그 남자와 결혼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가업을 잇기 위해 쿠사노로 들어왔다. 그녀가 스물네 살 때였다. 쿠사노에서는 시어머니가 다루마라는 스시 전문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르치는 건 배우는 일이다


 
▲ 이토야마 하루미
ⓒ 유신준

시어머니는 막내며느리인 그녀를 귀여워했다. 막내딸 재롱이라도 즐기듯 뭐든지 시켜보고 싶어 했다. 마침 시어머니가 전통춤에 관심을 갖던 시기였다. 그녀에게 함께 하자고 권했다. 춤 동료들에게 며느리 자랑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젊은 그녀는 전통춤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아이도 키워야 하고 식당일도 바빴다. 춤 배우는 시간에 건성건성 따라 다녔다.

고부가 함께 춤을 배우러 다니는 것이 사람들에게 좋아 보였던 모양이다. 주변에서 춤을 가르쳐 달라고 찾아왔다. 네가 한번 가르쳐 보라고 시어머니가 그녀에게 권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그녀는 못하겠다고 했다. 하다가 안 되면 그때 포기해도 되니까 일단 해보라고 재차 권했다.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춤 인생에 변화가 일어났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우는 걸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열심히 배웠다. 그 당시 시누이도 함께 춤을 배웠는데 시누이는 이미 전통춤이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다. 춤 선배 시누이는 하루미에게 엄격했다. 가르침은 엄격했지만 엄격함 속에는 올케에 대한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시누이가 큰 힘이 됐다.

앞서가는 시누이의 춤을 부지런히 뒤 쫓아갔다.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많은 가르침을 흡수했다. 그녀의 춤 인생 중에서 가장 뜨거운 시기였다. 그 시절, 춤은 사부 쪽 보다 오히려 시누이에게서 많이 배웠다는 생각이 든다. 시누이는 그녀에게 열심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마음속에는 늘 시누이의 가르침이 남아있다. 시누이는 춤의 스승이었다.

스물여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춤 선생 하루미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배우는 사람들은 대개 10명 내외였다. 제자 복이 있어서인지 주변에서 좋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 주었다. 그들은 40여 년을 한결같이 그녀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다.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들을 가르치며 배우는 게 더 많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이끌어 왔다기보다 사람들에게 이끌려 지금까지 왔다. 가르치는 건 배우는 일이다.

하루미에게 춤이란?


 
▲ 하루미(9월 20일 발표회)
ⓒ 유신준

춤은 자세다. 허리가 꼿꼿해야 춤이 산다. 처음 춤을 배울 때는 꼿꼿한 자세가 잘되지 않아 등에 대나무 자를 넣고 연습하기도 했다. 춤은 한 동작 한 동작 자세에 정성을 들여야 한다. 5분 내외의 간단한 동작들로 구성되는 공연이지만 40년을 넘게 배우고도 아직 자세가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춤은 완성이 없다. 공연 때마다 최선을 다하며 그 길을 갈 뿐이다.

춤은 또한 형식이다. 의상부터 소도구까지 모든 것을 공연내용에 맞춰 빠짐없이 준비해야 한다. 춤출 때 입는 기모노를 제대로 갖춰 입자면 오비 매는 법만 해도 수백 가지가 넘는다. 지우산이라든가 부채라든가 소도구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모든 형식의 기본은 동작이다. 동작과 의상과 소도구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야 비로소 춤이 된다.

춤은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춤은 동작이지만 동작은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제대로 된 동작이 나오지 않는다. 동작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 동작 하나하나에 그 사람의 심성이 드러난다. 그러니 동작보다 마음이 먼저다. 아무리 열심히 연습해도 잘 안 되는 때가 있다. 기량의 우열은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건 성실하게 열심히 하려는 마음자세다.

자신의 춤을 지탱해온 힘은 향상심이다. 무대에 설 때마다 다른 유파들과 비교하며 스스로 평가한다. 선의의 경쟁을 통해서 실력이 향상된다고 생각한다. 개울은 가늘게 흐르지만 나중에는 결국 바다가 되지 않던가. 무대에서는 몸짓 하나로도 그 사람의 춤이 보인다.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얼마나 성심껏 추고 있는지. 언제나 진검승부다. 늘 최선을 다한다.

진검승부는 팽팽한 긴장이 따른다. 그 팽팽한 긴장이 보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때 공연은 비로소 관객과 하나가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춤꾼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다. 귀한 시간을 내어 공연을 보러오는 분들에 대한 춤꾼의 기본 예의다.

어려운 일도 있다. 춤 모임의 화합을 이루는 일이다. 사람들의 모임인지라 아무리 조심해도 오해가 생겨 서로 등을 돌리는 일도 발생한다. 함께 춤추던 사람들과 틈이 벌어질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 춤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춤은 성심껏 노력해 나가면 반드시 향상된다. 그러니 춤 이전에 사람의 화합이 중요하다. 모임을 이끌고 나가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춤을 알게 되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상냥한 마음이 생겼다. 매년 열고 있는 장애인 돕기 자선공연도 그래서 시작한 것이다. 춤을 통해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게 기쁘다. 서로 돕고 사는 마음이 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언제까지 무대에서 춤을 출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매년 열리는 장애인 자선공연은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참가하려 한다.

불친절한 식당, 그곳에서 느꼈던 깊은 맛

그녀는 소탈하다. 그녀를 대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거다. 40여 년 동안 한 가지 일을 추구해온 사람에게서 풍기는 전문가의 까탈스러움같은 걸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런 유연함이 그녀를 돋보이게 한다. 큰 장점이다. 대할 때마다 마음이 넓고 여유로워서 좋다고 했더니 한마디로 되받는다. 덩치도 크잖아. 저 가릴 것 없는 여유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녀와 만남은 사연이 있다. 언젠가 전통 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는 쿠사노에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 일이다. 사진을 찍다 보니 점심시간이 지났다. 길가에 식당들이 보였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노랭(가게의 출입문에 간판처럼 내거는 베 조각)이 화사해 보이는 이쁜 식당으로 들어갔다. 비싼 곳이었다. 백수의 점심 예산을 세배나 뛰어넘는 가격이었다. 재정형편에 맞는 식당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앞집이었는데 외관도 실내도 어두워 보이는 곳이었다.

집만 어두운 게 아니었다. 사람도 무뚝뚝했다. 손님이 오면 평소보다 높은 톤의 목소리로 손님을 맞는 게 내가 아는 이 땅의 상도의인데 처음부터 그녀는 말이 별로 없었다. 단지 무엇을 드시겠느냐고만 물었다. 수수한 식당의 외관과 닮은 과묵한 안주인이려니 생각했다. 고작 점심 한 끼 때우는 건데 뭘. 벽에 붙어있는 메뉴 중에서 가츠동(돈가츠 덮밥)을 주문했다. 한참을 기다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맛있었다. 그냥 맛있는 게 아니라 평소에 내가 찾던 일본의 전통을 물씬 느끼게 해주는 깊은 맛이었다. 어라 이건 뚝배기보다 장맛이잖아.

배가 고파서 그런 건가? 비교를 위해 다른 식당에서 같은 메뉴를 주문해 봤다. 그 맛이 아니었다. 검증을 위해 몇 곳을 더 다녀 봤다. 어느 곳에서도 다루마의 가츠동 맛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음식을 먹어 봐도 그녀의 집은 맛이 있었다. 나는 다루마의 단골이 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기모노만 바뀌었을 뿐인데...


 
▲ 이토야마 하루미
ⓒ 유신준

어느 날 그녀가 티켓 한 장을 내밀었다. 전통춤 자선공연이라 했다. 더운 날씨에 자전거만 타지 말고 에어컨 빵빵한 실내에서 쉬기도 하라며. 객석이 어두우니 재미없으면 졸아도 되고 점심때는 맛있는 도시락도 준다며. 나는 결국 카메라를 들고 그녀의 공연장을 찾았다.

출입문 옆에 '공연장 내에서 일반인들의 사진촬영과 녹음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모처럼 카메라를 가져왔는데 안내판에 쫄아서 카메라도 못 꺼낼 내가 아니었다. 플래시를 번쩍거리는 일처럼 공연감상을 방해하는 짓만 안 하면 되지 싶었다. 나중에 직원의 제지를 받으면 촬영을 중단하기로 마음먹고 조용히 삼각대를 펼쳤다.

삼각대는 별 도움이 안 됐다. 삼각대를 조작하다 보면 필요한 앵글을 놓치기 일쑤였다. 객석은 어둡지만, 무대는 밝아서 셔터 스피드도 1/30초 정도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손에 들고 찍는 게 당연했다. 일을 쉽게 생각한 게 문제였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부터 어깨가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500그램짜리 카메라도 들기 힘들 정도였다.

공연에 깊이 빠질 수 있었다면 그나마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고전무용이라서 무대나 객석이나 나이 든 분들이 많다. 의상도 화려한 쪽보다는 수수한 쪽이 자주 등장한다. 춤을 안다면 '저 자세 완벽해, 이 동작도 아름다워' 하고 감탄하며 바쁘게 셔터를 누를텐데 깊은 고전무용의 오묘한 세계를 생 초보가 알 리가 있나. 내가 보기에는 기모노만 바뀌었을 뿐 같은 몸동작의 연속이었다. 고전 무용의 기본 동작들을 공연내용에 맞춰서 재구성한 것만 같았다.

공연은 짧으면 5분 길어야 10분 내외로 구성되는데 한편의 공연마다 하나의 스토리가 담겨있다. 대부분 역사 이야기다. 역사 속에서 등장하는 영웅들의 무용담이 주류다. 칼 찬 무사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고 보니 이 땅은 메이지유신 이전 700년간이나 무사들의 나라였다.

이 나라의 역사 무대에 무사가 등장하는 것은 12세기 중반 헤이안 말기다. 천황가의 권력싸움에 무사를 고용했는데 고용된 무사들이 세상을 뒤집어버렸다. 칼이 곧 권력이었던 어두운 중세였다. 그리하여 쇼군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정권을 잡은 것이 1167년. 무사 정권은 가마쿠라와 무로마치, 전국시대를 거쳐 에도 말기까지 길게 이어졌다.

1869년 메이지 유신으로 신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사무라이 시대였다. 그래서 이들의 역사 이야기는 무사들 영웅담이 많다. 오랜 시간동안 DNA에 축적돼 온 국민 정서다.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어사출도 장면이나 심청전에 등장하는 심 봉사 눈뜨는 장면이랄까. 스토리를 알아야 감흥이 오지 않겠는가. 게다가 무대 사진촬영은 춤동작이 빨라서 이것저것 따질 새 없이 그저 감으로 셔터를 눌러대야 했다. 무대에서는 숨 쉴 틈 없이 동작이 나오고, 셔터스피드는 한계를 넘나들고... 설상가상이었다.

좋은 관계는 삶을 풍요롭게 한다


 
▲ 이토야마 하루미
ⓒ 유신준

그래도 초대해 준 마음에 뭔가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보다 최소한 공짜 점심값은 해야 했다. 그런 마음이 없었으면 중간에 사진 찍는 일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몰랐었다. 만리타국 일본에서 평생 경험하기 힘든 카메라 중노동을 겪게 될 줄은. 열 시에 개막해서 마흔일곱 번째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장장 여섯 시간 동안 무려 1200장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나서 세 번의 선별 과정을 거치는 동안도 중노동은 이어졌다. 맨 처음에 핀트가 안 맞거나 균형이 틀어져 전혀 쓸모없는 것들을 지웠다. 두 번째는 추려진 것 중에 비슷한 동작이나 춤동작으로서 애매한 것들을 삭제했다. 마지막으로 그중에서 괜찮은 것들을 최종적으로 남기고 전부 지웠다. 1200장의 사진이 400장으로 줄어들었다. 작업을 마치고 한 개의 파일로 묶었다. 개운했다. 일을 마쳤다는 성취감이 온몸으로 밀려온다.

사진을 정리하는 일은 늘 힘들다. 사진을 찍는 건 셔터를 누르면 그만이지만 사진 정리는 하나하나 사진을 보며 판단을 해야 한다. 1000장을 넘어서면 사진을 보는 일부터 만만치 않다. 게다가 어렵게 찍은 사진을 지우는 건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던가. 다 귀여운 내 새끼들인데 도대체 이걸 어떻게 지우라는 말인가.

힘들었던 시간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다. 여섯 시간의 기억들이 600mb의 파일로 남았다. CD를 내미니 그녀가 깜짝 놀라며 좋아한다. 객석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줄 몰랐다며. 그 후 그녀는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는 내 수호천사가 됐다. 좋은 관계는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인연이란 묘한 것이다. 그녀를 몰랐다면 어떻게 그런 특별한 경험들이 가능했겠는가. 그날 점심시간에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면... 신은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을 열어놓는다고 했다. 실패했다고 불안할 거 없다. 뒤에 더 좋은 것이 준비돼 있을 수도 있으니까. 다루마 식당 그녀와의 특별한 인연처럼. 그러니 인생은 용감하게 부딪히며 부지런히 살아볼 일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겨레 사진마을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