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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중국)/┕ 연변 소식

북한 거쳐 백두산에 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by 윤라파엘 2015. 3. 19.

북한 거쳐 백두산에 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딸과 함께 떠난 통일여행①] 전남 나주에서 백두산까지

김형덕(hdkim106)

지난 1월, 2주간 떠난 중국 여행의 목적은 딸에게 남한의 국경이 38선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어서이다. 딸 세대 역시 책이나 여러 매체를 통해 북한도 우리나라이고 언젠가는 통일이 되어야 할 지역으로 배우지만 실제적 마음의 국경은 38선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는 각종 통일 관련 여론조사에서 익히 잘 드러나 있다고 본다. 이에 정말로 통일이 이루어져야 하는 당위성과 가능성, 또 그로 인한 유익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좀 더 북한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알려주고 싶었다.

큰딸과 함께 한 이번 중북 국경지역 통일여행은 우리 살고 있는 전남 나주시 혁신도시에서 시작되었다. 우선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있는 광주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아내는 늘 그렇듯 안전하고 능숙한 운전솜씨로 25분 만에 광주U스퀘어(버스터미널)에 딸과 나를 내려주었다. 광주에서 수시 출발하는 인천공항행 버스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4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서울 강남에 살 때 대략 이런저런 시간을 합쳐 2시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던 것보다는 두 배 정도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딸과 함께 하는 여행에 대한 기대감은 모든 걸 잊게 해주었다. 공항 도착 후 얼마 후 통상적인 수속절차를 거쳐  출국 수속대로 쑤욱 들어갔다.

매년 수차례씩 다니는 길이지만, 짐을 부쳐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이번만은 짐을 수화물로 부쳤다. 가방에 과일 깎는 작은 손칼과 면도크림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딸은 가방을 기내에 가지고 타기로 하고 출국심사대로 다가갔다.

수속 과정에서 딸은 가방에 든 스킨로션 때문에 다시 짐을 부치고서야 출국심사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 난 사전에 이러한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침묵했다. 비행기 타기까지 1시간 가량 여유 시간이 있고 이번 일로 공항 이용 문화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서였다.


얼마 후 탑승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옌지(연길-延吉) 공항을 향해 이륙하였다. 2시간 30분이 지나 우리가 탄 비행기는 중국 길림성 연길공항에 도착했다. 국제선 치고 긴 비행은 아니었지만, 예전보다 조금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 북한영공을 경유하면 1시간의 비행시간이 단축되곤 하였다. 연길공항에 내려 통상적인 수속절차를 거치고 출구를 빠져나는 시간은 인천공항과 비교해 다를 바 없이 싱겁게 끝났다.

한 10여 년 전만 해도 입국절차나 시간이 매우 까다롭고 더뎌서 다시 가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다. 적어도 연길공항은 한국의 공항과 비교해 수속 절차나 시간이 거의 같은 속도와 수준으로 발전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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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문 중국 국경. 
ⓒ 김형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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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공항을 빠져나와 우리가 향한 곳은 연길이 아닌 도문(도문-圖門)이었다. 최초 방문지가 방천(방천-防川)이기 때문이다. 방천(두만강 하구 중북러 국경)은 연길보다는 도문에서 가까운 곳이다. 마침 도문에서 지인이 차량으로 마중을 나와 주어서 아주 수월하게 도문으로 갈 수 있었다.

도문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약간의 휴식을 한 후 도문-남양(북한)국경으로 갔다. 북한의 풍경은 예전에 비해 건물의 높이는 변화가 없었지만 페인트칠이 입혀진 건물이 조금씩 생겨나 완전 흑백이었던 3~4년 전보다 다른 느낌이었다.

중북 국경을 돌아보고 나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야외에 설치된 스케이트장이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중국 동북지방은 동절기면 여기저기에 야외스케이트장이 많이 설치된다. 스케이트를 대여해 잠시 빙판을 달리려던 딸은 이내 포기하였다. 대여하는 스케이트가 아주 낡고 무디어서 제대로 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기 어려운걸 왜 돈 받고 대여하지?" 딸이 말했다. "유의 깊게 살피고 타야지... 우 리에게 눈이 없는 건 아니잖아" 처음에 스케이트 상태를 눈으로 보아 알았음에도 타고 싶은 마음에 빌렸던 건 우리 자신이 아니던가. 물론 다른 현지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가지고 온 스케이트를 멋지게 잘 타고 있었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원인을 파악하고 대응을 함에 있어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저녁에 인근에 위치한 도문조선공업원(중국기업들이 북한이 인력을 고용하여 기업을 운영하는)에 가보고자 그곳에서 사업하는 지인에 연락을 취했다. 지인의 말로는 요즘 조선공업원에 외부인이 출입하기 어렵단다. 일부 한국 언론사가 취재를 많이 해갔고, 이에 대해 북한이 항의하면서 일어난 일이란다.

공업원에서 일하는 북한 근로자는 작년 이맘때 600명에서 현재 6000명으로 늘었단다. 도문조선공업원 방문이 무산되어 이내 호텔로 돌아왔다. 그날 밤 호텔사장과 여러 대화를 주고 받았다. 주인장은 10여 년부터 이곳을 다니는 나에게 남북한에 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또 북한에 다녀오면 그곳의 소식을 전해 주는 분이다. 전형적인 중국인이다. 한국에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단다.

그가 말하길 "년 초에 조선의 총통(그는 김정은을 그리 호칭했다) 김정은이 남북관계를 전면적으로 발전시키자"고 TV에 나와 말했는데 "남한이 왜 북한과 교류를 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추가적으로 하는 말이 "자꾸 왔다 갔다 하면(교류) 저쪽이(북) 뒤집히는데(붕괴) 왜 남쪽이 교류를 막고 있는지 달통이 안 된다(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북조선 인민들이 이식이(사고) 바뀌면 통일되는 건 시간문제다. 한국이 좀 너그러운척하면서 왔다갔다 하다보면 북쪽은 개변될(체제변화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난 한국은 선거에 의해서 지도자가 선출되고 임기가 끝나기까지 특별한 국가적 손실을 초래하는 실책이 없는 한 탄핵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려줬다. 부분적 정책의 성패 여부는 국민들이 다음 선거에서 투표로 결정한다는 점을 말해주었다. 온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갸우뚱 하는 태도를 보였다.

다음날 주말이라 호텔 주인장이 직접 차량을 운전해서 방천(중러북 국경선이 합쳐지는 곳)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방천으로 가는 길 도로에서 좌측은 러시아가 우측은 북한을 국경으로 하는데, 그 폭이 채 100m도 안 되는 곳이 있었다. 중국영토 동쪽 끝까지 가서 전망대에서 채 1~2km만 가면 동해바다이지만 북한과 러시아의 영토에 막혀 더 이상 바다로 나갈 수 없게 된 구조였다.

여기에 와보면 중국이 왜 러시아쪽 항구와 북한 나선항에 관심을 갖는지 이해가 된다. 중국의 동북 3성은 해상을 이용하면 쉽게 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으나 러시아와 북한이 막고 있어 불가피하게 러북의 항구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니까.

방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훈춘(훈춘-曛春)에 들렀다. 현지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해온 지인이 한국으로 귀국한다기에 보기 위해서다. 훈춘에는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 포스코와 현대아산 등이 북한이 본격적으로 개방될 때를 대비해 물류단지를 건설하고 현지 사무소도 운영하고 있다. 강원도 속초시청과 경북 포항시청도 이곳에 현지 사무실을 두고 있다.

이들은 중국 동북지방 물류를 북한을 통해 남한이나 일본, 중국 남방 등으로 보내는 일을 추진하기 위해 나와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7~8년째 업무 답보 상태였다. 이런 점을 보면 한국의 기업과 공무원들 참 선견지명이 있고 변화에 대해 준비되어 있다고 본다. 훈춘에서 러시아거리 우즈베키스탄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도문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조선족자치주 수도격인 연길로 향했다. 연길에서는 이곳의 오랜 지인인 김사장이 숙소 안내와 함께 연길의 오랜 특색음식인 <진달래랭면>을 함께 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다음날 시작된 연길에서의 일정은 조선족자치주 대표적 교육기관인 연변대학교와 연변조선족동포들의 삶과 애환, 서민경제 활력 도를 엿볼 수 있는 서시장, 최근에 건설된 연길백화점을 들러보았다. 연길은 해마다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도시공해가 많이 줄어든 것이다. 최근 연간 연길 외곽에 지역난방회사를 건설하여 도시전체를 집중난방으로 교체하였다. 기존에는 각 건물별로 석탄보일러를 가동해 난방을 해결하였었다. 공공장소나 그 외 각종 건물에서의 실내 흡연이 많다는 점을 제외하곤 한국의 일반 도시와 문화적으로 다른 점이 오히려 적은 곳이 연길이다. 초고속 인터넷 와이파이, 편리한 대중교통(한국의 현대자동차 택시), 한국 물건이 즐비한 다양한 쇼핑센터 등등.

연길에서 이틀간의 여정을 마치고 우리는 백두산으로 향했다. 연길에서 룽징(용정-龍井)시로 이동하여 백두산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연기에서 용정역까지는 택시로 40분 정도 소요되었다. 룡정에서 기차를 타고 얼도빠이허(이도백하-二道白河)로 갔다.

이도백하진(백두산아래 첫동네 : 한국의 읍정도 규모의 행정지역) 도심은 중국정부의 관광 진흥 정책에 힘입어 많이 변화되어 있었다. 우선 호텔이 눈에 띄게 늘었고 도로포장이 작년에 비해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다른 중북 국경도시들에서처럼 이 지역 지인의 협력을 받았다. 기차역에서 숙소까지, 또 이도백하에서 백두산에 오가는 교통편을 제공했다.


다음날 백두산으로(북파) 입국까지는 지인의 승용차로 갔고 이후는 장백산국립공원에서 제공하는 버스로 백두산에 오를 수 있었다. 백두산천지 현지 기온은 영하 23도. 하지만 바람이 불어 체감 온도는 훨씬 더 낮게 느껴졌다. 역시 백두산의 광경은 여름도 멋지지만 겨울에도 장관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좀 오래 있다 내려가고 싶었지만 날씨가 그런 나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딸과 함께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우리는 곧바로 하산했다. 백두산(중국명 장백산)에 오르려면 들어가는 입구까지 택시를 타야 하고 또 입구부터 산 아래까지 버스로, 그 다음 지프차로 환승해 천지에 오를 수 있다. 1인 당 소요 비용이 10만 원 가까이 든다. 한국의 국립공원 입장료를 생각하면 아주 비싼 편이다.

하지만 중국까지 와서 백두산 천지를 보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 조건을 기꺼이 수용한다. 물론 중국인 관광객들도 대부분 멀리서 왔기 때문에 천지를 보려고 우리와 같은 심정으로 입장료를 지불한다. 통일 전에는 남북관계가 잘 풀려서 북한을 통해, 통일이 되어서는 당연히 남한의 국립공원을 방문하는 마음으로 백두산에 오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지난 1993년 북한을 탈출하여 1994년 남한에 왔다. 2001년 연세대학을 졸업하였고, 탈북자로는 최초로 국회/대성그룹 등에서 근무했고, 2005년 가족과 함께 금강산 여행을 다녀왔다. 2005년 북한을 올바르게 안내하고 통일에 기여한다는 취지로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 : www.facebook.com/atbppc'를 세워 운영하고 있다. 2008.08~2010.07 미국 뉴욕에서 연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