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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 대해서

by 윤라파엘 2011. 3. 22.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 대해서 (내공 30) 내공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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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8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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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5살 중학생입니다.

 

저희 아버지와 얘기를 하다 김우중 전 회장에 대해서 얘기가 나왔는데요.

 

저희 아버지는 현재 전 대우그룹 계열사였던 회사에서 차장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이 회사는 대우자동차에 자동차 부품을 공급하고 있으며 대우자동차가 부도났을 때엔 3개월간 월급이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대우자동차의 의존도가 높은 경우입니다. 현재도 GM대우 1차협력업체입

 

니다.

 

또 김우중 전 회장이 대우그룹 계열사 중 M&A방식이 아닌 직접 회사를 세운 경우입니다.

 

저는 아버지가 김우중 전 회장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그게 아니었습니

 

다.

 

아버지는 저한테 김우중 전 회장의 리더십이나 도전정신은 내가 배울 점이며 진심으로 김우중 전 회장

 

을 존경하는 듯 했습니다.

 

제가 궁금한 점은 김우중 전 회장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대우그룹이 붕괴한 이유와 분식회계에 대해 구

 

체적으로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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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에 대해서 (내공 30)

wiazard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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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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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인사

감사해염^^

1. 김우중 전 회장은 어떤 사람인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세계경영’ 신화의 명멸 출발선은 지난 67년 3월 ‘청년 김우중’의 대우실업 창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 무역부장으로 있던 31세 청년이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대우그룹의 잉태를 예고한 것이다.

대우(大宇)라는 상호도 대도섬유의 대(大),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자본금 500만원의 대우실업은 창업 첫해 싱가포르에 트리코트 원단과 제품을 팔아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린 데 이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뒀다.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대우그룹 축성의 종잣돈을 마련한 그에게는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칭이 따라붙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카루스의 꿈’은 의욕적인 창업보다는 왕성한 기업 사냥을 통한 ‘다계열, 다업종’ 확장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73년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또 76년에는 한국기계를 흡수해 대우조선으로 개편한 옥포조선소과 묶어 대우중공업을 만들었고, 앞서 74년 인수한 대우전자와 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뭉쳐서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성장시켰다.

 

동양증권과 삼보증권도 사들여 83년 대우증권으로 터를 잡았다.

 

그 뿐만 아니라 74년에는 교통부가 서울역 건너편에 짓다가 만 교통회관도 챙겨 지금의 대우센터라는 그룹의 거점을 확보했다. 이같은 급속한 외형확장의 결과 72년 수출 5위라는 눈부신 기록을 남긴데 이어 창업 15년만에 대우를 자산순위로 따져 국내 4대 재벌로 성장시켰다.

 

김우중 전 회장은 특히 금융과 해외영업에서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면서 압축적 고속성장에 주력한 ‘박정희 정권’에서 가장 두드러진 기업인으로 주목받았다. 전직 고위관료와 한국은행ㆍ산업은행 출신 금융인들을 다수 포진시켜 급속한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금융조달 및 정부지원 등을 이끌어 냈으며 이는 나중에 ‘정경유착’ 의혹을 불러 일으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70년대 무섭게 입지를 넓힌 그는 80년대 중반 한때 대우조선 경영악화와 노동쟁의 등 난관에 부딪히면서 부도설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80-90년대 내내 세계경영을 화두로 내걸고 ‘성장일변도’ 전략을 구사했다.

 

특히 90년대들어 과거 사회의주권 국가였던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이 결과 93년말 185곳에 불과했던 해외 네트워크가 98년말에는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모두 589곳으로 늘어났고 해외고용 인력도 2만2천명에서 15만2천명으로 불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대통령은 당시 그를 ‘킴기즈칸’이라 부르기도 했다.

당시 김우중은 연간 해외 체류기간 280일을 넘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운동권 출신 특채는 파격적 발상의 일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92년 대통령선거 출마설과 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사건 등으로 시련의 계절을 맞으면서 크게 흔들리기도 했지만 당시만 해도 대우 신화는 계속됐다.

 

그러나 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돌입은 대우 신화의 붕괴를 예감하게 하는 결정적인 신호탄이었다.

국가신용등급 추락의 여파로 해외 채권자들로부터 극심한 상환압력을 받게 된데다 해외 자산에서 가공할 타격을 받으면서 세계경영의 허점이 노출된 것이다. 특히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갈등과 마찰이 쇠락을 재촉했다.

 

김우중은 98년 1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 환란위기 극복을 위한 500억 달러의 무역흑자론을 내세워 수출과 해외부문이 강한 대우의 강점을 일반화시킨 ‘국가 프로젝트’ 변경을 주창했다.

 

이같은 주장은 김 당선자의 공감을 어느 정도 얻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관료들은 이에 대해 ‘대우의 생존전략’이라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면서 IMF 프로그램에 의한 부채비율 축소 등에 강조점을 찍었다. 이런 가운데 김우중은 98년 3월 전경련 회장을 맡아 재계의 얼굴로 나서는 승부수를 던지면서 ‘수출론’을 집중 부각시켰으나 관료들과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렸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맞았다.

 

그러다가 98년 당시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핵심사안으로 꼽혔던 대우차-GM 합작 추진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금융감독위의 기업어음(CP) 발행한도 제한 조치에 이어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비상벨이 울린 대우그룹은 99년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구조조정 방안도 발표했으나 일파만파의 자금난을 극복하고 새 출발을 다지기에는 시간도, 역량도 부족했다.

 

결국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그는 99년 8월 대우그룹 모든 계열사들의 워크아웃이라는 극약 처방을 받았고, 그해 10월 중국 공장 방문 이후 귀국하지 않은 채 지금껏 5년10개월째 도피 행각을 벌여왔다.

 

출처 :  http://www.chosun.com/economy/news/200506/200506120242.html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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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전 회장은 31살이던 지난 67년, 자본금 5백만원으로 서울 명동에 대우실업 간판을 세웠습니다.

자본금 중 절반은 빌린 돈으로 사실상 무일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 한국경제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나가면서 대우그룹도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99년 공식 해체되던 당시 대우그룹은 총고용인원 15만명, 계열사 41개,국외법인 396개의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큰 기업이었습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일년의 3분의 1이상을 해외에서 보내고 비행기를 침실겸 사무실로 여기던 김 전 회장의 도전정신이 성공의 밑바탕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김 전 회장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문어발식 확장으로 그룹의 덩치를 키우는데만 주력하는 바람에 계열사 부실을 피할 수 없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41조원의 분식회계를 지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김 전 회장은 하루아침에 성공신화의 주인공에서 우리 경제의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린 주범으로 전락한 채 99년 10월 쓸쓸히 해외유랑길에 올랐습니다. 이 때 김 전 회장은 대우직원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대우의 밝은 미래를 위해 어두운 과거는 스스로 짊어지고 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고도성장시대의 경영을 답습하다가 끝내 모든 것을 잃고 만 실패한 경영인의 뒤늦은 후회였습니다.

출처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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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우그룹이 붕괴한 이유

 

대우그룹 몰락의 원인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간략히는 수익성 및 경쟁력 제고 등 내실 경영을 외면한 채 세계경영을 내세워 무리한 확장경영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우그룹은 지난 67년 자본금 5백만원의 대우실업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이후 눈부신 확장과 잠깐의 슬럼프, 또다시 놀라운 확장을 거듭해 98년 말에는 총자산 규모 77조원, 총매출액 62조원의 거대기업군으로 성장했습니다. 당시 국내외에 거느린 계열사만도 290개사 정도였고 총자산 순위도 현대에 이어 국내 대기업집단 2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대우그룹의 급성장은 창업자인 김우중 회장의 남다른 기업가적 안목과 의지가 있었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정부의 산업정책을 잘 활용해서 정책 및 금융상 특혜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김 회장은 60년대에 정부가 경공업 육성 정책을 펼 때 가죽, 섬유 등 경공업을 주력 계열사로 키웠고, 70년대 중반 정부가 중화학 육성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자 기계, 자동차, 조선공업 등으로 주력 사업을 옮겼습니다. 또 80년대 들어 하이테크 산업 육성 정책이 추진되자 이에 발맞추어 가전, 전기통신, 반도체, 항공기조립 등으로 진출했습니다. 90년대 들어 정부가 세계화를 주창하자 대우 역시 세계경영을 내세워 해외사업을 대대적으로 확장했습니다.
 
그런데 대우는 다른 많은 한국재벌들이 그러했듯이 그와 같은 사업확장을 기존 사업의 이익을 통한 자금이 아닌 외부 차입에 의존해서 추진했습니다. 특히 사세 확장 과정에서 많은 부실기업을 인수하면서 정부의 특혜금융을 많이 받았습니다.
 
대우의 이같은 성장방식은 급속한 외형 확장과 더불어 낮은 이익률과 높은 부채비율이라는 허약한 재무구조가 굳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IMF 외환위기 이후 기업환경과 재무구조가 악화되고 엄청난 자금난에 시달리면서도 근본적인 구조조정은 추진하지 않고 회사채, CP 등의 금융 차입을 통한 기업확장을 계속했습니다. 오히려 외환 위기 이후에도 국내외 계열사를 지속적으로 확장하여 1995년 138개이던 국내외 계열사가 1999년에는 289개에 달할 정도로 계열확장은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극도의 자금난에 시달리면서도 쌍용자동차를 인수했고,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를 맞교환형식으로 빅딜을 추진하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IMF 이후인 1998년 매출액은 62조원으로 수치상으로는 전년 대비 24.7%가 증가했으나, 이런 매출액 증가는 주로 밀어내기식 수출은 통한 매출채권 증가(9.2조원)에 따른 것으로 실질적인 현금유입이 이루어지지 않아 부채비율은 계속 높아갔습니다. 밀어내기식 수출은 적자수출과 맞물려 돌아가면서 수익구조를 악화시켰고 금융비용의 증가를 초래했습니다. 그 결과 그룹 전체 당시순이익이 1997년 4천억원 흑자에서 1998년에는 6천억원 적자로 반전했는데, 실제로는 적자 규모가 수조원대에 달했다고 합니다.
 
영업환경이 악화되고 재무구조가 급속히 나빠지고 있는데도 계열사 매각, 기구축소, 감원 등 근본적인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CP 및 회사채 발행 등 외부 차입을 통해 부족한 자금을 조달했습니다. 이에 따라 대우그룹의 총차입금 규모는 1997년 말 28조7천1백20억원에서 1998년 8월 말에는 46조2천4백30억원으로 불과 8개월 사이에 17조5천3백10억원이나 증가했습니다. 특히 IMF 직후 해외 현지법인의 현지금융(외채) 상환 요구가 쇄도하자 이를 위해 고리의 회사채나 CP를 통해 자금을 조달했는데 금리가 25~30%에나 달했습니다. 그후 금융당국의 강력한 대출회수정책으로 총차입금은 약간 줄어들었지만 이미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대우 붕괴는 초읽기에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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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분식회계란?
 
김우중 회장과 대우그룹 붕괴 이유는 적기에 너무 분량이 많아서 ^^;
잘 정리해놓으신 기사와 사이트 검색으로 갈음했습니다~
 
분식회계만 제가 설명드리면..
 
분식을 한자로 쓰면 가루분(粉) 꾸밀식(飾)을 쓰는데요.
풀어보면 가루를 뿌려서 꾸민 형상이라는 뜻이겠죠?^^
즉 자신의 결점을 감추기 위해서 화장을 진하게 하여 이쁘게 보이려는 여성의 모습을 상상하면 더욱 이해가 잘 되리라 봅니다. 그럼 분식회계란?
 
회계장부를 남들 보이기 이쁘게 꾸며서 보여주는 것이겠죠
다시말해, 기업이 자산이나 이익을 실제보다 부풀려서 재무재표상의 수치를 고의로 왜곡시켜 행하는 회계를 뜻합니다.
보통 주주나 채권자들은 자신이 투자하려는 기업의 재무재표를 보고 그 기업의 건전성과 안정성을 평가하여 투자를 합니다. (물론 그것으로 모든것을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
하지만 이러한 분식회계는 주주나 채권자(은행포함)를 속여 자신의 기업에 투자를 하게끔 하는 사기행각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예를 들면, 회계계정별로 비용으로 들어가야하는 항목인데 자산으로 잡아버린다면 상대적으로 순익은 올라가고(손실은 줄어들고) 자산이 늘어나니 부채비율도 떨어지게 되지요. 그래서 기업회계기준이란게 있고 그 기준에 의해서 작성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또한, 회사내부사람은 얼마든지 회계장부를 분식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장부를 작성하고 나서 회계사(회사외부사람)들로부터 기업회계기준에 따라 잘 작성된 회계장부인지 검토를 받게 됩니다.(이것을 회계감사라 합니다) 그래서 회계사들도 적정하다는 의견을 내면 비로소 재무제표로 인정받고 공개되게 됩니다. 그 재무제표를 가지고 투자가들과 은행은 판단을 내리죠 (경제신문보시면 재무제표가 실려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

대우의 분식회계가 적발되었을 때 담당 회계법인사는 파산하고 관련 회계사들은 구속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회계사들과 대우와의 암흑의 거래가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회계사들에게 뇌물을 주고, 분식회계를 지시하여, 국가경제를 파탄시켰으니 그에 대한 벌을 받은 셈이겠죠 ^^; 
 
그럼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