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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수도원 순례기 <하>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 - 위대한 침묵 속으로

by 윤라파엘 2011. 12. 1.

중일일보 기사인용 [중앙일보] 입력 2011.12.01 00:29 / 수정 2011.12.01 10:51

1000년 동안 열리지 않은 문 … 하얀 수도복 노수사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프랑스 동부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의 개인 작업실에서 한 수사가 작업을 하고 있다.

비밀스런 장소였다. 영화 ‘위대한 침묵’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는 더욱 그랬다. 봉쇄수도원. 그것도 무려 1000년 전에 세워진 수도원이다. 한 번 들어가면 죽어서도 나오지 않는 곳, 그런 삶의 패턴을 1000년째 이어오고 있는 곳. 1986년 필립 그로닝 감독이 영화 촬영을 요청했다가, 16년 뒤인 2000년에야 허락이 떨어졌던 곳. 그 허락 마저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던 곳. 바로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본원인 그랑드 샤르트뢰즈(Grande Chartreuse) 수도원이다. 그곳을 찾아 ‘위대한 침묵’을 만났다.

 17일 버스를 타고 카르투시오 수도원을 향했다. 수도원은 프랑스의 작은 마을 생피에르 드 샤르트뢰즈에 있다.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500㎞쯤 떨어진 곳이다. 길가 풍경은 강렬했다. 알프스 산맥의 줄기를 타고 험준한 산세가 이어졌다. 수도원은 해발 1300m에 있었다.

 버스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을 찌르는 전나무 숲이 울창했다. 계곡과 숲, 그리고 암벽이 굽이굽이 펼쳐졌다. 그렇게 한참을 올랐다. ‘그랑드 송’으로 불리는 산 정상에는 거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그 아래 카르투시오 수도원 본원이 있었다. 동양의 사찰처럼 수도원도 ‘명당 중의 명당’에 있었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의 본원. ‘침묵’을 뜻하는 수도원 앞의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버스에서 내렸다. 수도원 건물이 보였다. 담벼락은 무척 높았다. 그곳은 방문객의 출입이 허용됐다. 알고 보니 수도원에서 옛날에 썼던 건물이었다. 지금은 수도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행여 봉쇄수도원의 겉모습만 보고 돌아오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갔다.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었다. 이곳은 한때 카르투시오 수도원 본원이었다. 덕분에 수도원의 실제 생활 공간을 낱낱이 볼 수 있었다. 수사가 생활하는 독방으로 갔다. 작은 침대와 책상,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좁은 공간이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난로도 있었다.

수사들이 생활하는 독방. 침실과 기도공간·책상 등이 놓인 단출한 공간이다.

 그들이 무릎을 꿇던 곳,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영화에 나왔던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고개를 떨구고 만다. 지지고 볶는 일상, 무한경쟁의 틈바구니를 헤쳐가야 하는 현대인은 엄두도 내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이미 모든 걸 포기한 걸까. 과연 그런 걸까.

 예전에 저녁자리에서 이해인 수녀가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수녀원에서 식사를 할 때는 주로 함께 앉아서 먹는 사람들과 먹어요. 하루는 식판을 들고 가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죠. ‘내가 이 수녀원의 수녀님들을 얼마나 깊이 알지?’ 그래서 식판을 들고 다른 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했어요. 그 동안 깊이 알진 못했던 수녀님들과 함께.”

 그랬다.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설사 그게 봉쇄수도원이라고 하더라도 절로 마음이 끊어지는 건 아니다. 세상의 희로애락을 수도원 안에서도 똑같이 겪기 때문이다. 카르투시오 수도원도 마찬가지였다. 복잡한 서울의 봄·여름·가을·겨울과 고요한 카르투시오의 봄·여름·가을·겨울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집중이 더 강하고, 더 길고, 더 고요할 뿐이었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설립자 성 브루노(1035∼1101) 사제. 대주교가 돼 달라는 요청을 뒤로 하고 봉쇄수도원의 수사가 됐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에서 침묵은 필수다. 수사들은 침묵했다. 방에서도 침묵, 식사 때도 침묵, 일 할 때도 침묵, 온종일 침묵이다. 그들은 그저 침묵만 하는 걸까. 아니었다. 수사들은 침묵을 통해 수없이 물음을 던졌다. 그들의 기도, 그들의 묵상, 그들의 독서는 모두 물음이었다. 신을 향해 그들은 물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묻는 저는 또 누구입니까?” 입이 침묵할 때 물음은 심장을 향한다. 수사들의 침묵은 그저 엄격한 규칙이 아니었다. 더 풍성한 물음을 던지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니 침묵이 위대한 것이 아니었다. 침묵을 통해 던지는 ‘물음’이 위대한 것이었다.

 그리 보면 현대인의 일상도 수도원이다. 사람들은 반박한다. “매일 문제가 생기는 데 무슨 수도원인가?” 따지고 보면 ‘문제’가 있기에 일상이 수도원이 된다. 이치가 꼬일 때 문제가 생긴다. 이치가 통하면 문제도 풀린다. 그러니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번뇌야말로 정확하게 이치가 꼬인 지점이다. 거기가 묵상의 급소다.

 수사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독방에서 지냈다. 성당에서 공동으로 드리는 미사를 제외하면 말이다. 혹자는 그걸 “감옥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감옥은 갇힌 곳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는 곳이다. 수도원의 독방은 달랐다. 수사들은 기도와 묵상과 노동을 통해 무한히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닫힌 곳은 열린 곳이 된다.

 수도원의 독방에도 창문이 있었다. 독방의 아래층은 작업실이었다. 개인별 뒤뜰도 있었다. 거기서 꽃도 키우고, 채소도 키웠다. 봉쇄수도원의 수사들은 꽃과 풀, 나무를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찾았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 불교의 무문관(無門關) 수행은 상대적으로 삭막하게 느껴졌다. 화장실 딸린 방에서만 지내고, 밖에서 넣어주는 밥만 먹으니 자연과 교감도 어렵다. 오히려 병이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전나무 길을 따라 산을 올랐다. 박물관에서 2㎞쯤 떨어진 곳에 수도원 건물이 있었다. 수도원의 가이드 엘리슨은 “현재 20명의 사제 수사와 12명의 평수사, 그리고 수도원장 등 모두 33명이 생활하고 있다. 몇 달 전에 스물일곱 살 먹은 흑인 수사가 새로 입회했다. 가장 연세가 많은 분은 80세쯤 된다”며 “영화 ‘위대한 침묵’이 상영된 후 방문객이 부쩍 늘었다. 올해만 4만 명이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수도원 담장은 높았다. 출입은 1000년의 세월 동안 금지돼 있다. 담장 너머, 1000년의 침묵이 흘렀다. 수사들은 그 침묵에 답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 길에 수도원 담장에 붙은 셔터 문이 열렸다. 달려갔다. 하얀 수도복을 입은 노수사가 서 있었다. 몇 살인지, 언제 수도원에 들어왔는지 물었다. 그는 “1964년에 들어왔다. 70세다”라며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무려 47년째 카르투시오 수도원에서 사는 셈이다.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가 터졌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한마디만 했다. “낫 포 저널!(Not for journal·언론에 싣지 마시오)”

 운이 좋았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에서 직접 수사를 만났으니까. 전나무 숲길을 내려오다 뒤돌아 섰다. 내려오다 또 뒤돌아 섰다. 수도원은 조금씩 멀어졌다. 대신 우리가 돌아가야 할 산 아래 수도원, 일상의 수도원은 점점 가까워졌다. 담장 아래서 만난 노수사의 표정이 하산의 발걸음을 따라왔다. 완고하지 않았다. 무척 자애로웠다. 맑은 눈과 맑은 웃음, 그게 침묵에서 길어 올린 그리스도의 시선일까.

영화 ‘위대한 침묵’의 말미에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한 장님 수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장님으로 만들어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내 영혼에 이롭다고 여기셔서 배려를 하신 거다.” 살을 찌르는 고통의 가시마저 감사의 눈물로 치환하는 힘. 그건 끝없이 내 안으로 내려가는 기도와 명상의 힘이기도 했다.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생활=수도자들은 개인 은수처(隱修處)에서 침묵하며 생활한다. 1층은 작업실, 2층은 침실 겸 기도실이다. 오전 6시30분에 일어나 오후 7시30분에 잠자리에 든다. 다시 오후 11시30분에 일어나 밤 기도를 하고, 오전 3시30분에 잠자리에 든다. 종일 미사와 기도, 묵상과 노동을 되풀이 한다.

생피에르 드 샤르트뢰즈(프랑스)= 글·사진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