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그림두컷 구경하기
곽충서의 동양화
이인상의 장백산도 두개 중 하나
곽충서의 종이 연 과 이인상의 장백산도 가 그려진 재미있는 동기를 듣다가 옮겨 보았다.
대가의 그림은 장난으로 생산되어도 역시 대가의 그림으로 남겨진다.
그림의 탄생이야기가 들어있는 김병기 교수의 글 한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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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麟祥의 ‘長白山圖’는
長白山(백두산)을 그린 게 아니다
-〈조선후기 그림의 氣와 勢〉展에 출품된 ‘長白山圖’에 대한 一考 -
김 병 기(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 서예가, 서예평론가)
Ⅰ.
한국에서 書와 畵를 전업하는 사람은 물론 書와 畵에 약간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학고재 화랑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간에 학고재 화랑은 한국의 書畵史를 돌아보게 하는 굵직한 전시를 어느 화랑보다도 치밀하게 기획하여 수차례에 걸쳐 매우 알차게 진행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학고재 화랑이 이번에도 알찬 전시를 준비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하였다. 지난 4월 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조선 후기 그림의 氣와 勢〉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전시에 부쳐 학고재 출판사에서는 「고서화 도록」 제8권〈조선후기 그림의 氣와 勢〉(이태호 엮음)도 출간하였다. 학고재 출판사에서 출판해온 여느 책이 다 그랬듯이 이번의 도록도 매우 꼼꼼하게 자료를 정리하여 해설을 붙이고 전문가의 논문을 함께 수록하여 한국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선명한 도판과 친절한 해설, 게다가 전문가의 논문까지 읽다보면 누구라도 한국의 그림에 대해서 보다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자도 학고재 화랑을 찾아 도록을 구입하여 필요한 내용을 도록의 여백에 메모해가며 〈조선 후기 그림의 氣와 勢〉를 감상하였다. 정말 좋은 작품들이었다. 일부 이해하기가 어려운 작품들도 있었으나 그것은 내 소양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고 더 높은 안목을 갖추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름대로 꼼꼼하게 그림들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살펴보는 과정에서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의 작품 〈長白山圖〉(도판1) 앞에 섰을 때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너무 좋은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림의 왼쪽 하단에 갈필로 쓴 畵題(도판2:부분 확대)를 읽고서는 이인상의 해학과 재치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전시를 관람한 후 도록에 수록된 논문들을 살펴보았다. 유홍준 교수(현 문화재청장)가 쓴 「문기의 선비화가 능호관 이인상의 〈장백산도〉」라는 논문도 있었다. 나는 이 논문을 읽어 나가다가 유교수의 생각과 내 생각이 약간 다른 점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유홍준 교수가 “잘 모르겠다.”며 해석을 유보한 ‘곽충서의 종이 연’에 대한 고사도 내가 전에 어디선가 보았기 때문에 대강의 뜻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것저것 자료를 뒤져 내 생각이 맞는지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내 견해도 전혀 터무니없는 견해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월간서예》의 지면을 빌려 내 생각을 조심스럽게 펴 보이고자 한다. 이처럼 내 생각을 내보이는 뜻은 결코 유홍준 교수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곽충서의 종이 연’에 관한 고사는 중문대사전을 비롯한 연구용 큰 사전이나 전문 미술사전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은 고사이기 때문에 그 뜻을 알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 고사의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제화 문장의 대의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수는 전문가적인 안목으로 오히려 대의를 잘 짐작했으며 의심이 가는 부분에 대해서는 함부로 속단하지 않고 해석을 유보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따라서 나는 제화 문장에 대한 유교수의 해석을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우리 조상이 남긴 명작을 보다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누구라도 개진할 수 있는 의견을 한번 개진해보고자 할 따름이다. 독자 제현의 관심과 指正을 바라는 바이다.
Ⅱ.
논의의 편리를 위하여 우선 유홍준 교수의 글을 일부분 전재하도록 하겠다.
이 장백산도 그림의 왼쪽 끝에는 부서진 돌가루 같은 느낌의 메마른 초서로 유려하게 써내려 간 畵題가 있어 그림과 글씨가 하나의 조형 요소로 어울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그 내용을 보면 그 창작 동기가 아주 흥미롭다.
가을비 내리는 날 계윤 씨(김상숙의 자)를 찾아갔다. 종이를 내놓고 그림을 요구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곽충서(송나라 화가)의 종이연(무슨 고사인지 모름)을 생각나게 했다. 계윤이 이 때문에 웃으며 ‘원령이 너무 나태하다’고 하였다. 장백산도를 그리고 나서 붓을 놓고 함께 웃었다.
秋雨中, 訪季潤甫, 出紙索畵, 令人有郭忠恕紙鳶想, 季潤因笑, 曰元靈懶甚, 作長白山, 爲之方筆一笑.
아마도 여백을 너무 많이 남긴 것에 대한 농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장백산은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어서 주목된다. 근경 언덕과 먼 산경, 그리고 그 사이의 빈 공간을 보면 백두산 천지와 비슷한 점도 없지 않다. 허나 과연 이인상이 백두산을 탐승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후기 그림의 氣와 勢〉66쪽)
이상과 같은 유홍준 교수의 글을 보면서 초서로 쓴 畵題에 대한 해독 상 두 글자에 대해 견해가 다름을 발견하였다. 유교수가 ‘有’자로 본 글자를 나는 ‘於’자로 보았고 유교수가 ‘爲’자로 본 것을 나는 ‘可’자로 보았다. 그리고 구두점을 찍는 위치에도 다름이 있었다. 곽충서의 종이 연에 대한 고사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 문장을 보았다면 당연히 그런 구두와 해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구두점을 찍었다.
秋雨中, 訪季潤甫, 出紙索畵, 令人於郭忠恕紙鳶想季潤, 因笑曰: “元靈懶甚, 作長白山可之”, 方筆一笑.
이렇게 찍은 구두점을 토대로 나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하였다.
「가을 비 내리는 날, 계윤씨를 찾아갔더니 그는 종이를 내놓으며 날더러 그림을 그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그(계윤)를 곽충서의 종이연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하였다. 이에, 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 원령(이인상의 字)은 게으름이 심하니 장백산이나 그리는 것이 가능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다 그린 후 붓을 놓고서 한바탕 웃었다.」
그렇다면 이게 과연 무슨 뜻일까? 이 화제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유홍준 교수가 해석을 유보한 「곽충서의 종이 연」에 대한 고사를 알아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고사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 북송시대 초기의 유명한 화가였던 곽충서(郭忠書)는 사람들이 그림을 요구해도 쉽게 응하지 않았다. 누가 요구한다고 해서 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완전히 자신의 흥취가 일 때만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그가 기(岐) 지방에 살고 있을 때 어느 부자가 그의 그림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 부자는 매일같이 곽충서에게 좋은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정성을 다하였다. 그의 마음을 사서 그림을 얻기 위함이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이런 극진한 대접을 한 후, 어느 날 부자는 마침내 그림을 얻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아울러 그 앞에 그림을 그릴 하얀 비단 한 필을 내 놓았다. 이 부자는 생각하기를 ‘이처럼 넓은 비단을 한 필이나 내 놓았으니 비단의 크기에 걸 맞는 큰 그림을 그려 줄 것’이라며 잔뜩 기대를 하였다. 그런데 곽충서는 그의 기대와 상상을 완전히 뒤엎는 그림을 그렸다. 곽충서는 먼저 아주 작은 소년을 그렸다. 그 소년은 연을 날릴 때 쓰는 연실 감는 틀(세칭 ‘연자세’)을 들고 있었다. 이어, 곽충서는 그 연실을 감는 틀로부터 매우 가는 선으로 실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실을 그리는 선 하나를 긋는 것으로 그 넓은 비단의 면을 거의 다 채운 후 실의 끝에 연 하나를 그려 넣었다. 그렇게 해서 그림을 완성해 놓고 보니 결과적으로 그 넓은 비단에는 작은 소년 한 명과 하늘 높이 떠있는 작은 연 하나만 그려진 셈이 되었다. 곽충서는 그림을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그림을, 그것도 분수에 넘치는 큰 그림을 요구하자 일부러 그 넓은 비단 안에 작은 소년 한 명과 연 하나, 그리고 가는 실만으로 ‘연 날리는 풍경’을 그려서 준 것이다. 그러자 그 부자는 노발대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이미 곽충서는 그의 요구대로 넓은 비단에 그림을 다 그린 셈이니....(※이 고사는 소동파의 문장 어디에선가 본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아직 구체적인 출전은 확인하지 못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는 고사의 내용을 이미 확인하였다. http://www.kite.
net.cn 참조)이인상은 바로 곽충서의 이러한 고사를 ‘곽충서의 종이 연(郭忠恕紙鳶)’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이인상이 비오는 날 친구인 계윤을 찾아갔더니 아마 계윤이 이인상의 그림을 얻기 위해 다짜고짜 종이를 내놓으며 그림을 그리라고 했던 모양이다. 다정한 친구가 그리하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친구를 보면서 이인상은 불현듯 곽충서를 향해 그림을 요구했던 부자에게 소년과 연을 그려준 곽충서와 종이 연의 고사가 생각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그(계윤)를 곽충서의 종이연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하였다(令人於郭忠恕紙鳶想季潤:직역하자면 ‘곽충서의 종이 연에서 계윤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런 계윤 앞에서 이인상은 곽충서처럼 소년과 종이 연 사이를 잇는 한 가닥의 실로 화면을 다 메우는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다. 이에 그는 순간적인 발상을 하였다. ‘그래, 나는 종이 연 대신 산을 그리되 길게 공백을 남겨 두는 산 즉, 장백(長白)의 산을 그림으로써 곽충서의 종이 연 그림 못지않게 그려진 부분보다 공간으로 남겨놓은 부분이 훨씬 많은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계윤을 향해 말하기를 “나 원령은 본래 게으름이 심한 사람이라서 부지런히 피사체를 그림으로써 화면 가득 피사물을 채우는 그림은 그릴 수 없으니 가능한 한 공간을 많이 남겨 두는 長白(긴 여백)의 산이나 그리려네.”라는 뜻으로 “元靈懶甚, 作長白山可之.”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元靈’은 타칭이 아니라 이인상 자신이 자신을 일컬은 자칭으로 보아야 한다. 마침내 다 그리고 화제 쓰기까지 마치려고 하는 순간에 이르고 보니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인상은 붓을 놓고서 친구 계윤과 함께 한 바탕 웃은 것이다(放筆一笑). 참으로 재미있는 화제이다. 이 화제로 인하여 이 그림은 훨씬 진한 감동을 준다. 이런 게 바로 문인화이다. 문인의 해학과 재치와 우정이 차원 높은 방법으로 드러나지 않게 녹아 있는 이런 그림이 바로 문인화인 것이다.
〈長白山圖〉안에 쓰여진 화제를 곽충서의 고사와 관련지어 이상과 같이 해석하고 보면 그림의 제목인 〈長白山圖〉의 長白山은 실지의 長白山 즉 백두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길게 여백을 둔 산, 다시 말하자면 길고 넓게 화폭의 대부분을 여백으로 처리하고 산 자체도 가능한 한 붓질을 적게 한 그림이라는 뜻이다. 이인상의 〈長白山圖〉는 결코 장백산 즉 백두산을 그린 게 아닌 것이다. 따라서 유홍준 교수가 이 장백산도의 화제에 대해 “아마도 여백을 너무 많이 남긴 것에 대한 농담이었을 것이다.”고 평한 것은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아울러, 유홍준 교수가 이 장백산도에 대해 “그런데 장백산은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어서 주목된다. 근경 언덕과 먼 산경, 그리고 그 사이의 빈 공간을 보면 백두산 천지와 비슷한 점도 없지 않다.”고 하여 이 그림이 백두산의 실경을 화가의 의지로 변화시켜 그린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했다가도 곧바로 말을 돌려 “허나 과연 이인상이 백두산을 탐승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매우 신중한 연구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상으로 능호관 이인상이 그린 장백산도의 화제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나의 소견을 밝혀 보았다. 맞는 견해인지 모르겠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해서 보다 더 명확하게 알아야한다는 생각아래 부족함을 무릅쓰고 졸견을 제시해 본 것이다. 사계 제현의 指正을 거듭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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