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라파엘 2017. 1. 15. 16:57

울산 저널에서 인용한 울산권 천주교 선교지 자료 입니다.   


16 사진1 순교자현양비

<울산 장대벌 순교자 현양비>


우린 때론 죽음에 대해 질문한다. 어떤 이는 죽음 뒤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고, 다른 이는 없다고 믿는다. 있음을 믿는 자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영혼 불멸을 믿고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도 예외가 아니다. 많은 신앙인이 사후 세계를 보장해주는 신을 믿고 죽음을 불사하면서 신앙을 지켰다. 영남알프스는 순교자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지역이다.


16 사진2 언양성당

<영남지역 천주교 신앙의 뿌리인 언양성당 주변에는 6곳의 공소가 있었다.>


죽음을 불사하며 신앙을 지킨 순교한 신앙인들


통도사 무풍한송 이름바위에서 윤선응(尹善應, 1812~ ?)이란 이름을 볼 수 있다. 그는 고종 시절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일성록>에 “고종 5년(1868) 음력 8월 15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윤선응이 천주교 죄인 김종륜(金宗倫, 루가)·허인백(許仁伯, 야고보)·이양등(李陽登, 베드로)을 효수경중(梟首警衆)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들은 울산의 장대벌에서 참수 당한 후,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아 둠으로써 군중에게 사학(邪學)을 경계하는 대상이 되었다. 세 명의 순교자가 처형된 것은 1866년부터 무려 8년 동안이나 간헐적으로 지속한 병인박해 때였다.
허인백(야고보, 1822~1868)은 김해 출신으로 언양 간월로 이주해 살다가 경신박해 때 체포되었으나 풀려 난 바 있다. 그 후 1868년 병인박해 때 간월보다 더 깊은 산중의 대재공소(죽림굴)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충남 공주에서 박해를 피해 온 김종률(루가, 1819~1868)과 대재공소 회장이던 이양등(베드로, ?~1868)의 가족들을 만난다. 이 세 가족은 안전한 피난처를 물색하다가 경주시 산내면 단석산중 석굴(일명 범바위굴, 소태골)을 찾고 이곳에 12명의 가족을 피신시켰다. 이들은 목기(木器)를 만들어 팔고 마을로 내려가 밥을 빌어오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으나 밤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기도를 드리는 등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이즈음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으로 대원군이 크게 노해 매우 혹독한 박해령을 내렸기 때문에 포졸들은 혈안이 되어 깊은 산 속까지 신자들을 찾아 샅샅이 뒤지고 다녔던 때였다. 1868년 5월 체포되어 경주에서 가혹한 형벌과 신문을 받던 이들은 2개월 후 울산으로 이송되어 문초를 받다가 마침내 8월 울산 장대벌에서 순교했다.
순교자들의 유해는 허인백의 부인이 수습해 사형장에서 조금 떨어진 현재 울산 남구 중구 남외동 동천강 진장교 근처 강둑에 이들의 시신을 임시 매장하였다. 그 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어 교인들의 장례가 가능해지자 연고가 있는 경주 산내면 진목정 안산에 합장한다. 그러다가 1932년 대구 월배 천주교회 묘지로 이장하고, 1962년 월배 묘지 내 성모상 앞의 석함 속에 안장됐다가, 1973년 대구 복자 본당으로 이장됐다.


16 사진4 순정공소 원아들

<1920년대 상북면 순정공소 유치원과 원아들 모습. 이로 보아 당시 공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천도교의 모태인 공소는 쇠락하지만 의미있는 공간이다


언양성당에서 경주 산내면 범굴까지는 21km가 된다. 그 가는 길에 울주군 상북면에 길천공소, 순정공소, 궁근정리공소, 살티공소가 현존하고, 세 순교자의 무덤이 있었던 경주 산내면 진목정공소가 있다. 공소란, 신부님과 성당이 귀했던 시절, 성당처럼 교인들이 모여 미사를 드렸던 곳이다. 한국천주교의 모태는 공소였지만 지금은 옛날처럼 운영되지는 않고 있다.
언양 지역의 첫 신앙 공동체는 1790년경에 해주 오씨 문중의 오한우(베드로)와 사촌 처남 간인 경주 김씨 문중의 김교희(프란치스코)가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여 입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초기 언양지역은 간월산 불당골, 탑골, 상선필 등 세 곳에서 신자촌이 형성되어 서로 연락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움막집을 짓고 토기, 옹기, 숯을 구우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 후 언양성당에 소속된 16곳의 공소가 있었을 정도로 언양은 영남 천주교의 뿌리로 주변에는 순교자들의 흔적이 많다.
길천공소는 멀리 천길바위가 보이는 간월산 아래 상북면 길천리 후리마을 평지에 있다. 후리1길 19에 소재한 공소는 붉은 벽돌 건물 앞에 예수님이 반가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비교적 깔끔한 벽돌 건물로 단단하게 여겨진다. 공소 안에는 신부님이 가톨릭 신자들이 행하는 일정기간의 수련생활인 피정(避靜)을 하고 계신다. 피정은 묵상·성찰·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 공소는 1958년 순정공소에서 분리되었다. 영남알프스 아래 공소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16 사진6 살티순교성지

<살티공소는 생존을 위해 모인 자들의 신앙공동체였다. 살티순교성지는 꽤 넓은 공간에 십자가의 길 등이 잘 조성되어있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순정공소는 그만큼 많은 성직자를 배출했다


길천공소에서 도보로 10여 분 거리에 순정공소가 있다. 순정마을 뒤는 천화현 밝얼산이 있고, 앞에는 너른 오산들이 펼쳐져 있다. 논 가운데에는 밀양의 마고 할미가 두고 간 흙더미인 동뫼가 있다. 순정공소는 순정1길 8에 있다. 마침 길을 잘못 들어 어떤 집에 들어서니 토박이 천주교 할매가 자세히 안내한다. 74살의 경주 내남면 출신의 김씨 할매(74세)는 윗대부터 아들까지 천주교 집안이다. 올해 폐암으로 돌아가신 할배 대신 농사일을 하는데, 솥가마 고구마를 먹으라고 주신다. 배가 고파서인지 꿀떡처럼 맛있게 먹었다. 할매의 시아버지 친척들이 순정공소를 지었다고 한다. 백 년 넘은 감나무 아래 입구에는 공소 설립 100주년(1913~2013) 기념비가 있다. 붉은 벽돌에 하늘색 지붕을 한 공소 건물 왼쪽 앞에 성모마리아를 모시고 다양한 장식을 해놓아 밤이면 멋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1860년경 이곳에 신자촌이 형성되고, 첫 신자인 김규흡의 아들 김 베드로가 약령시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다. 1913년 12월 16일 드망즈 안 주교가 축성하였고, 당시 규모가 꽤 컸고 유치원까지 있었다. 1951년 울산에 본당을 설립할 계획으로 공소건물 2채 중 유치원 1채 25평을 뜯어 복산동(현 복산성당)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아직도 공소 뒤 유치원 자리에 우물이 남아있다. 순정공소 출신의 주교, 신부, 수녀가 다수 있다. 공소는 많은 성직자가 순방하였고, 또 휴양지 및 피정지의 역할도 하였다. 공소 건물 출입문이 두 개인데 남녀가 구별 사용한 듯하다. 공소에는 고양이와 강아지가 많이 우글거린다. 할매는 가족묘까지 보여주며 아쉬운 듯 다음에도 놀러 오라고 한다.
궁근정리공소는 숲이마을에 있다. 십자가도 성모 마리아상도 없는 그냥 그런 평범한 시골집이다. 인기척도 없고 무 시래기는 햇살 받아 말라가고, 한가로이 고양이만 오가고, 빨랫줄에는 빨래 대신 무말랭이 같은 것이 얼기설기 엮인 채로 줄에 매달려 널려져 있다.


16 사진5 살티공소 내부

<살티공소 내부. 소박한 공간이다. 천장은 빗물 누수로 훼손되었다.>


삶의 터전이 곧 신앙공동체였던 살티마을에는 순교자의 흔적이 있다


살티마을은 석남사를 지나 왼쪽 청수골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살티는 화살을 만든 곳이라 ‘살터’ 또는 피난해서 살 수 있는 곳이라서 ‘살티’라 불린 곳이다. 호랑이 등 맹수들이 많아서 감히 사람들이 살지 못했고, 인근 입석 바위는 호식 바위였다. 처음 병인박해 때 안살티에 있었으나 그 후 부근의 사기점으로 옮겼으며, 다시 박해가 끝날 무렵에 현재 공소로 옮겨왔었다. 살티공소는 1868년부터 있었던 곳으로 부산 교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소로 현재의 건물은 1982년에 부산교구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되었다. 성소 앞에서 만난 89살 영천 오씨 할매는 걸음도 잘 못 걷지만 14살부터 시집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한단다. 한때는 애 업고 언양성당까지 걸어 다녔단다. 공소가 옛날에는 초가집이었다며, 공소의 성모 마리아가 합장하며 “오늘도 잘하고 있네!” 격려하시는 듯 느낀단다.
살티공소는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를 거치면서 간월공소(1858년 등억리 안간월 불당골에 있었다고 한다)와 죽림공소(대재공소, 간월산 중턱의 죽림굴, 천주교 신자들이 관헌의 추적을 피해 신앙을 지키던 국내 유일의 천연석굴 공소이며 한국판 ‘까타꼼바’라 할 수 있다)로 숨어들었던 신자들이 경상도 지역에 본격적으로 행해진 경신박해(1860년)와 병인박해(1868년)를 피해 더욱 안전한 곳을 찾다가 모여든 곳이라 한다. 이곳에는 순교자의 묘가 있다. 김영제(베드로, 1827~1876)는 간월골에서 허인백(야고보) 등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다가, 허 야고보 등은 울산 장대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처형되었고, 김영제는 경주에서 서울로 이송되어 수감되는 동안 심한 주뢰형의 고문을 받아 종지뼈가 떨어져 나가는 등 9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다시 살티로 와서 생활하던 중 순교했다. 그의 무덤 옆에는 죽림굴에서 은신하며 전교하던 최양업 신부를 도와주다 순교한 여동생 김 아가다(1836~1860)가 묻혀있다. 묘는 잘 정돈되어 있고, 주변에는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는 수난의 십자가 길을 형상화한 부조가 있다.
이제 울산을 떠나 경주 산내면 진목정공소를 찾아간다. 문복산 계곡을 따라가는 데 겨울 햇살이 따사롭다.


16 사진3 순정공소

<100년의 역사를 가진 순정공소에서는 주교가 배출되기도 했다.>


진목정은 참나무 정자가 있는 마을에서 유래했다. 공소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공소 뒤 450여 미터에 세 분의 순교자를 임시로 묻었던 곳이 있다. 대나무 숲길을 지나 계곡 물길 따라 올라가니 무덤이 있고, 진목정 성지 순교자 기념성당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다시 세 분의 순교자가 숨었다가 잡힌 범굴을 간다. 피정의 집에서 범굴로 가는 길은 850미터 정도로 길을 잘 닦아 놓았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두세 명이 걸어도 될 정도로 넓었다. 예수 수난의 상징인 14개 십자가의 길을 만들었다. 이번 태풍 때문인지 거의 범굴 가까운 곳에서 산사태가 있어 길이 끊어졌다. 20여 분을 지나 9부 능선에 위치한 범굴에 도착했다. 범굴은 위에서 무너져 함몰되어 동굴이었다는 흔적만 있다. 10여 명이 생활할 정도의 규모는 충분히 되어 보인다. 돌무덤에 묻혔던 예수처럼 범굴도 묻혔다.


16진목정공소 내부

<진목정공소 내부>


16언양주변 공소들

<언양주변 공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