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正祖, 1752년 음력 9월 22일 ~ 1800년 음력 6월 28일)는 조선의 제22대 임금이다.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사후 시호는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공선왕(恭宣王)이며 능은 수원(水原)의 건릉(健陵)이다.
드라마 ost 약속의 애정한 가사내용
기억 하나요 가슴 아픈 사연을
내님 오실 날을 저울질 하나요
한참 후에야 그 마음을 알았죠
내가 아닌 곳에 머물러 있다는 걸
내게 올 순 없나요 사랑할 순 없었나요
그대 헤일 수 없는 맘 나 였던가요
잊지 말아요 가슴 아픈 사랑이
슬퍼하는 날엔 내가 서 있을께요
내게 올 순 없나요 사랑할 순 없었나요
그대 헤일 수 없는 맘 나 였던가요
이대로 안되나요 돌아올 길 잊었나요
그대 헤일 수 없는 맘 나 였던가요
잊지 말아요 가슴 아픈 사랑이
슬퍼하는 날엔 내가 서 있을께요
1759년(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되고, 1762년 세자인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동궁으로 불렸으며, 1764년 2월 어려서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 뒤의 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1775년 11월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홍인한(洪麟漢)이 "동궁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내세우며 반대했으나, 그해 12월 대리청정의 명을 받았고,
정조는 즉위한 다음날 어제봉안(御製奉安)의 장소로 마련했던 규장각(奎章閣)을 9월에 준공, 역대 왕의 문적들을 수집해 보관하게 하고,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을 비롯한 많은 책들을 거두어 수장하게 했다. 1777년 12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외각(奎章外閣)이라 하고, 1782년 2월 강화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신축했다. 규장각에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 등을 각신(閣臣)으로 선발해 후한 녹봉을 주고 연구에 몰두하도록 했으며, 정조 자신도 이들과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누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학문을 논했다.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했다. 아버지 장헌세자가 당쟁으로 희생되고 자신도 당쟁의 직접적 피해를 입음으로써 당쟁의 폐해를 절감하고, 자기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이름하는 등 당색에 구애되지 않고 인물 본위로 관리를 등용하려 했다.
개혁정치의 지향
정조대왕 태실비 /강원 영월군에 있는 정조대왕 ...
정치체제를 정비하면서 정조가 의도했던 개혁은 1777년 반포된 대고(大誥)에 "민산(民産)을 만든다, 인재를 무성하게 한다, 군사를 다스린다, 재정을 풍족하게 한다"는 4개 항목으로 집약되어 있다.
민산의 문제는 경계(經界)에서 시작한다고 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전제(田制)의 개혁으로 파악하고, 조선 초기의 제도였던 직전법(職田法)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이는 정조 치세 동안에 실시되지는 못했다.
상공업은 말업(末業)으로 파악했으나, 농민의 이농현상에 따른 도시 소상인의 증가에 대해서는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실시함으로써 해결을 기도했다.
군사문제는 군문(軍門)의 혼란을 지적하여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이를 점차 확대하여 모든 군문의 기능을 병합, 장악하려는 시도를 했다. 재정의 문제는 축적에서 시작한다고 보고, 전통적인 주자학자들의 주장인 절약과 검소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라고 보았다.
재화를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서 생산력 발달을 강조하는 북학파를 중시하고, 응지진농서(應旨進農書)를 받는 등 농업생산력 발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재정확립을 위한 기초 조사로서 중앙 각 관서와 군영의 보유양곡수를 조사한 〈곡부합록 穀簿合錄〉,
전국에 걸친 환곡의 현황을 조사한 〈곡총편고 穀總便攷〉, 전세 징수의 기본상황을 파악한 〈탁지전부고 度支田賦考〉 등을 간행했으나, 구체적 방안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밖에 1776년 궁방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세금을 거두던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금지했다. 1777년 서얼들의 허통요청으로 〈서류허통절목 庶類許通節目〉을 정했다. 1778년 가혹한 형벌을 완화하기 위해 형구(刑具)의 규격과 품제를 정한 〈흠휼전칙 欽恤典則〉을 발포하고, 도망노비를 추쇄(推刷)하는 노비추쇄법을 폐지했다. 1782년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역(曆)을 미리 계산하여 〈천세력 千歲曆〉을 편찬·간행했다. 1783년에는 〈자휼전칙 字恤典則〉을 반포하여 흉년에 버려지거나 굶주린 아이들을 구하는 법을 정했다.
재위중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확산되어 사회문제가 되었으나, 서학의 발흥은 정학(正學)인 주자학이 융성하면 저절로 없어질 것으로 보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리하여 1791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신주를 불지르고 제사를 폐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났으나, 천주교 박해를 주장하는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두 사람만을 처형함으로써 사건을 더이상 확대하지 않았다.
또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장헌세자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그 묘를 영우원(永祐園)이라 했으며, 묘호(廟號)를 경모궁(景慕宮)이라 하고, 1789년 18만 냥을 들여 경기도 양주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 이듬해 용주사(龍珠寺)를 개수·확장해 장헌세자의 명복을 빌게 했다.
1800년 6월 개혁의 의지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갑자기 죽은 뒤, 유언에 따라 현륭원 동쪽 언덕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1821년 효의왕후가 죽자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옮겨 합장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왕족의 태반(胎盤)을 묻은 석실(石室).
정조의 친필
정조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정조의 여인들
* 드라마 시청자의견 게시판에 조지효 씩 올린 의견발췌 ,,
입궐한 순서->효의 왕후 -> 원빈 홍씨 -> 화빈 윤씨 -> 의빈 성씨 -> 수빈 박씨 입니다.
먼저 효의 왕후가 아이를 갖지 못하자 원빈 홍씨(홍국영의 누이)가 먼저 입궐 한 뒤, 혜경궁 홍씨의 명으로 화빈 윤씨를 먼저 불러 들이고, 의빈 성씨를 왕의 뜻대로 입궐시켰습니다.
그런데 원빈 홍씨는 아이를 갖지 못하고 혜경궁 홍씨가 불러 들여 입궐한 화빈 윤씨는 의빈보다 늦게 낳은 딸이 돌도 않되어 죽었습니다. 그리고 화빈 윤씨 보다 아이를 먼저 낳은 의빈 성씨는 아들을 낳았지만, 장남인 문효세자가 5살 때 화병으로 죽었으며, 자식이 모두 죽자 수빈 박씨를 입궐 시켜서 조선의 제23 대의 왕 선조를 낳았습니다.
제가 하나더 알려 드릴게요.
정조 이 산과 효의왕후가 같이 무덤을 자리 하였고, 효창공원에있는 효창원은 의빈 성씨와 그의 맏아들 문효세자가 묻혔다고 하네요.
제의견은 여기까지 제시합니다.
* 의빈 성씨와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 이산을 보면서 , 역사적인 사실은 어떠했는지
자료를 찾아본 내용이다.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드라마에서 와 달리 의빈성씨는 도화소의 다모가 아닌
평범한 양반집 규수였다고 한다. 2010.4.18 일